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43번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공약으로 ‘소비자 수리권’을 제시했다. EU나 미국 등에서는 2년 전부터 순환경제의 일환으로 ‘수리권(right to repair)’을 제시한 바 있는만큼, 한국에서도 이가 실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후보는 “주요 생활용품의 소모성 부품 보유·판매 기간을 현행보다 늘리거나 새로 도입해 생활용품 수명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기업이 부품 보유와 수리 편의를 위한 제품 규격화에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애플 등 글로벌 IT 기업 상당수는 원 부품을 사설 수리센터에 공급하지 않는다. 공식 센터에서는 액정 하나를 교체하는데 30만 원이 훌쩍 넘기에 소비자들은 중고품에서 분리한 부품을 쓰거나 중국산 복제 부품을 쓰지만 수리비가 절반인 사설 업체로 몰릴 수밖에 없다.

삼성, LG 등 수리센터를 방문하면 최신 기계가 아닌 이상 부품을 찾기 어렵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원활한 수리를 위해 스마트폰이나 PC, 노트북 등은 4년, TV와 냉장고는 8년, 세탁기 6년간 부품을 보유해야 하지만, 현장에서 이는 유명무실하다.

이같은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이 후보는 수리용 부품 보유 의무 및 보유 기간을 확대하고, 수리 매뉴얼 보급 등으로 편리하게 고쳐쓸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탄소배출과 수리권의 상관관계도 언급했다. 이 후보는 “휴대폰·노트북 등 전자제품 수명을 1년 연장하면 자동차 200만 대가 배출하는 400만 톤의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며 “고쳐 쓰고 오래 쓸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기후 위기에도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겠다”고 언급했다. 

 

전자제품 수리 가능성은 몇 점?

수리권에 에너지 등급제+수리 가능성 점수 부여한 EU

EU의회는 지난 2020년 11월 ‘수리권(right to repair)’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자제품이 고장 났을 때 손쉽게 수리를 받을 수 있게 해, 제품을 최대한 오래 쓰게 하자는 목적이다.

법안에는 EU 내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 세탁기, 냉장고, TV 등 전자기기들의 부품을 사설업체에서도 살 수 있도록 강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수리점은 최소 10년 동안 제품 수리가 가능하도록 전자제품 부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가 직접 가전제품을 수리할 수 있도록 제품 수리 매뉴얼도 첨부하도록 했다. 

또 수리 가능성의 정도를 1~10점으로 점수를 매기고, 이를 제품에 부착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수리 매뉴얼의 가용성, 예비 부품의 가용성, 예비 부품의 비용, 분해의 용이성, 제품 유형에 따른 특수성 5가지 기준으로 제품의 전반적인 내구성과 수리 가능성을 평가한다.

이 법안의 배경에는 탄소감축이 있다. EU 지역의 1인당 연간 전자제품 폐기물은 17.7㎏인데, 이 중 재활용 비율은 40%가 채 되지 않는다. 비르기뉴스 신케비추스 EU 집행위원은 이날 "기존의 '(새 제품을) 사서 쓰고 버리는' 식의 소비 모델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인구와 소비는 계속 늘어나고, (인류는) 환경과 자원의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지난해 3월에는 대대적인 에너지 효율 등급 표기를 교체하기도 했다. EU는 에너지 효율 등급에서 A+, A++ 등을 없애고 A~G등급 기준을 적용했다. 1994년 에너지 라벨을 처음 도입한 이후 대부분의 전자제품에서 E,F,G 등급은 사라진 반면, A등급을 넘어 A+, A++ 등급은 속출하는 등 등급 인플레이션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에너지 효율 판결 기준으로 기능을 상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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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비자들에게 제품 에너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QR코드 부착도 의무화했다. 연간 소비량이 아닌 100 사이클당 에너지 소비량이 표기되고, 물 소비나 소음 정도도 확인할 수 있다.

 

수리권 보장 위해 저작권법 개정까지 한 미국

미국은 작년 7월 9일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미국 경제에서의 경쟁을 촉진하는 것에 대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제조업체가 자사 제품의 자체 수리나 사설업체를 통한 수리를 막는 행위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미국의 공정거래위원회라 불리는 연방거래위원회(FTC)도 애플을 비롯한 스마트폰 제조 업체들의 수리 제한 관행을 독점에 따른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재하겠다고 나서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소비자들의 직접 수리를 허용하기 위해 미국 의회도서관 산하 저작권청(USCO)는 1998년 제정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을 일부 개정하기도 했다. 저작권법 상 저작권이 보호되는 디지털 창작물이 포함됐기 때문에 기기가 고장 났을 때라도 소유주가 직접 수리하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이를 기기를 소유한 사람이 직접 수리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예외조항을 신설하면서, 수리할 자유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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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관련 법안이 국회에 게류 중이다. 지난해 11월 15일 정의당은 소비자에게 구입한 제품에 대한 수리할 권리를 부여하는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사업자에게는 소비자 개인 능력으로 수리가 가능하게끔 제품을 설계하도록 했고, 수리 장비·부품에 대한 쉬운 접근을 보장하도록 했다. 환경부를 주무부처로 해 관리·감독할 책임을 부여했다.

 

'수리권'은 대기업 서비스 아닌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

UN이 발간한 ‘2020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적으로 5360만톤의 폐기물이 발생했지만 적절하게 수집되고 재활용 폐기물은 17.4%에 불과했다. 전체 발생량 가운데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81만8000톤으로 1.5% 수준이지만, 1인당 한 해 발생량은 15.8㎏으로 세계 평균인 7.3㎏의 두 배가 넘는다.

전 세계 전자 폐기물 배출량/UN Global E-Waste Monitor 2020

수리로 제품의 수명을 연장한다면 폐기량은 줄어들 수 있다. 아이폰12의 경우 탄소 배출량의 83%가 생산공정 단계에서 발생한다. 유럽환경국의 연구결과,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할 경우 2030년까지 매년 21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년 동안 100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맞먹는 양이다.

환경적 요소 외에도 ‘내돈내산’한 제품에 대한 소유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소비자 수리권은 중요하다. 미국 소비자 공익연구 단체인 US PIRG는 “제조업체가 독점적으로 수리를 하게 되면 높은 수리비용과 긴 수리 기간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용을 더 들이더라도 새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US PIRG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제품을 교체하는 대신 수리할 경우 한 가구당 연간 약 330달러(DR 39만4736원)를 절약할 수 있으며 이를 미국 전역으로 확대했을 경우 약 400억 달러(약 47조원)를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과 애플 등 테크기업을 대표하는 로비단체 TechNet는 "소비자 개인정보 보호 안전을 위태롭게 할 뿐"이라며 자가 수리 움직임을 비판했다. 하지만 수리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기업을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애플은 2019년 자신들이 공인한 독립적인 수리업체에 교육, 부품, 도구, 매뉴얼, 시스템 등을 제공하고, 자사 인증을 받은 수리업체가 부분 수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미국에 시범적으로 도입했다. 2020년엔 유럽, 캐나다에서 시작했으며, 작년 3월에는 향후 200개국 이상에서 이 제도를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한국의 경우 제품 수리는 권리가 아닌 대기업의 서비스 차원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전자기기 수리권 확보를 위해서는 수리업체 확대, 제조업체의 수리 정보 제공뿐 아니라 제품 설계 단계에서 수리・재활용 가능성이 고려되는 에코디자인, 충전기 등 부속품의 장기화 등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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