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사의 이슈 리뷰】 신년사에 등장한 ESG

2021-01-11     hindsight

대기업 CEO들의 신년사에도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가 등장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하고 있다/한화그룹 제공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ESG와 같은 지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글로벌 기업의 핵심 경영 원칙으로 자리 잡아 왔다. 글로벌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리더로서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며, 탄소제로 시대를 선도하기 위한 환경 경영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이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포스코 그룹 제공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

 “기업의 ESG 경영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더욱 커지면서 우리의 기업 시민 경영이념 실천이 보다 중요해졌다. 지속가능성장 모범기업으로서 사회적 가치 창출의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SK와 한화그룹의 주요 계열사, 현대제철과 롯데케미칼, 그리고 우리금융그룹, 하나금융그룹, 농협 같은 금융권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들이 ESG 경영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명시적으로 ESG를 언급한 기업이 없었다는 점에서 2021년을 맞아 ESG가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에서 오랫동안 신년사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이 변화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기업의 신년사는 CEO가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새해 메시지다. 지난 한해 동안 임직원들의 노고에 대한 치하, 대내외 경영환경 변화에 따른 새해의 경영전략과 목표, 무재해 안전∙노사관계∙동반성장∙CSR 같은 주요 경영 과제에 대한 당부, 그리고 위기에 대한 대응과 조직문화의 혁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긴다. CEO가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CEO가 신년사에 들어갈 핵심 메시지를 구술해주면 담당자가 관련 부서와 협의하여 정리하거나, 반대로 전략팀이나 홍보팀 같은 실무부서에서 먼저 초안을 만들어 CEO에게 보고하기도 한다.

 

신년사에 들어가는 내용이 늘 거창하고 엄중하다 보니 임직원 입장에서는 오히려 식상하고 재미가 없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예외 상황이지만, 예년의 경우 새해 첫날 시무식에서 CEO가 신년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과 다를 바 없어 매년 시무식에서는 ‘이런 것 좀 바꾸면 안되나’ 볼멘 소리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예 시무식 행사를 없애고 CEO가 TED 형식으로 새해 경영계획을 발표하거나 이해관계자들과 소통의 자리로 대체해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다.

 

기업의 신년사는 출입기자들을 통해 외부에도 공개된다. 키워드나 핵심 메시지 위주로 간략히 소개되기도 하고, 신년사를 통해 기업들의 새해 경영전략을 들여다보는 기획기사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여러 부서의 검토를 거치다 보면 외부에서 볼 때 이슈가 될만한 내용은 사라지고 덕담 수준의 상투적인 내용이나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한 위기의식과 과감한 혁신 혹은 미래 비전을 강조하는 당위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기 쉽다.

 

재미있는 것은 실무 검토 과정에서 세부 경영전략이나 재무적 목표들은 대외비가 많아 대부분 관련 부서에서 두루뭉술하게 고쳐달라고 하는데, 동반성장이나 CSR 관련 부서들은 가능한 더 많은 내용과 액기스를 추가해 달라고 한다. 자신들의 활동이 어떻게 재무적 성과로 이어지는 지 측정하기 쉽지 않은, 바로 ESG 관련 부서들이다. 이들은 평소 현업 부서로부터 ‘돈 벌기도 바쁜데 무슨 동반성장, 사회공헌으로 귀찮게 하냐, 사업이 잘 돼야 그런 것도 할 거 아니냐’는 불만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신년사를 통해 CEO가 동반성장이나 CSR을 강조하면 현업부서에 그나마 ‘말빨’이 먹힌다. 대외 평가에서도 CEO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이랬는데, 이제는 많은 CEO들이 신년사에서 ESG 경영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언급하고 있으니 실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락(BlakRock)의 CEO 래리 핑크(Larry Fink)가 투자기업들에 보낸 서한에서 지속가능성회계기준위원회(SASB, Sustainability Accounting Standards Board)와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 포스(TCFD, 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 ure) 가이드라인을 준용해 기후변화 및 ESG관련 정보공개를 요구할 예정이라고 밝힌 후 국내외 금융기관과 투자기관들의 ES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올해 신년사에 ESG의 등장을 추동했다고 짐작된다.

 

올해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SK 최태원 회장의 신년사다. 어느 매체에 전문이 공개되어 읽어보니 직접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정성’이 느껴졌다. 성남에서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노숙자와 홀몸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는 김하종 신부님의 이야기라든지, 기후 변화나 팬데믹 같은 대재난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린다는 언급, 그리고 기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당장 실행 가능한 부분부터 시작하자면서 SK의 행복도시락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그랬다. 신년사가 나온 며칠 후 SK가 3개월간 취약계층에 도시락 40만개를 지원한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직접 ESG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태원 회장은 이미 지난해 ESG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신년사를 하고 있는 SK 최태원 회장/SK그룹 제공

 

우리는 이미 기업 경영의 새로운 원칙으로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축으로 하는 

파이낸셜 스토리 경영을 설정하고 방법론을 구상하고 있다.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같은 숫자로만 우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연계된 실적, 주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꿈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생존법이다. 

(2020.9.22, 임직원 대상 이메일 메시지 ‘2020년의 한 가운데서’ 중에서)

ESG는 선택이 아닌 새로운 규칙이 돼야 한다. 

기업이 경제적 가치만 고려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도록 ESG를 기업 경영에 고려해야 한다. 

(2020.10.21~23, 제주 CEO세미나)  

이런 발언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말 그룹경영의 전반을 논의하는 SUPEX추구협의회에 에너지∙환경위원회 대신 ‘환경사업위원회’를 신설했고,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관계사의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가속화하기 위해 ‘거버넌스위원회’도 만들어 ESG에 힘을 실었다. 계열사 16곳에도 ESG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ESG 경영을 위한 신속한 행보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너가 있는 기업에서 일이 되려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사회적 가치에 이어 ESG 경영도 여전히 최태원 회장 주도의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기업들이 내세운 ESG가 신년사에 피상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경영전략과 통합되고 밸류 체인(Value Chain)에 내재화될 수 있을 지, 나아가 개발도상국과 같은 해외 사업장이나 상황이 열악한 협력업체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는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ESG를 화두로 한 신년사를 보면서 우리 기업들이 이제 재무적 성과뿐만 아니라 환경이나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기업으로, 지배구조가 투명한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   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   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   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   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   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이슈 리뷰】코너   를 통해, ESG와 관련한 다양한 기업 이슈를 담아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