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 대통령 신년사에는 무엇이 빠졌을까?

2021-01-22     박란희 chief editor

환경 관련 해외 뉴스를 보면,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들이 많이 보인다. 지난 주에 봤던 사건은 영국 유력지 가디언(The Guardian)에 소개된 재판 소식이었다. 천식을 앓고 있는 40대 방글라데시 남성이 “고국의 위험한 대기오염으로 인해 조기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극 변호한 결과, 추방명령을 뒤집은 것이다. 프랑스 보르도 항소법원은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병리 악화’에 직면할 것이라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거두라고 결정했다. 예일대와 컬럼비아대 환경성과지수에 따르면, 2020년 방글라데시의 대기질 수준은 세계 179위를 기록했으며, 대기 중 미세입자 농도는 WHO 권장 최대치의 6배에 달한다. 환경 전문 변호사인 사일리시 메타(Sailesh Mehta)는 이 판결에 대해 “앞으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상 일부 지역에선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됨에 따라, 대량이주가 표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앞으로 10년 동안 이 같은 이주민들이 수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낸 미국과 EU 등은 올들어 ‘지속가능성 이슈’에 급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예상대로 파리기후협정에 공식 재가입했다. 20일(현지시각) 취임식을 마치고 업무를 시작한 뒤 처음 사인한 행정명령 서류였다. 파리기후협정은 지구온난화와 파국을 맞기 위해 2015년 맺어진 국제 협정으로,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195개 당사국에 구속력을 지닌 첫 기후변화협약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 지명자 또한 전날 열린 청문회에서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조세정책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금융시스템 리스크를 검토할 새로운 허브(전담팀)을 신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장 바이든 행정부는 연방 권한의 토지와 해역에 석유 및 가스 시추 허용을 잠정 중단하시켰다. 현장에서는 “해외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게 될 것” “6만개 이상 일자리와 8억 달러 손실을 초래한다”는 반발 목소리도 제기된다. 하지만 정책 변화를 예상한 미 상공회의소는 지난주 “의회는 기업들에게 온실가스 배출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기후변화에 관한 기존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지난주 영국에는 ‘테라 카르타(Terra Carta, 지구 헌장)’가 큰 화제가 되었다. 영국 왕위 계승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가 발표한 환경판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이다. 지속가능성 이슈, 환경 문제 등에 50년간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찰스 왕세자는 2020년 1월 다보스 연설에서 ‘지속가능한 마켓 이니셔티브(Sustainable Markets Initiative)’를 창설을 밝힌 바 있는데, 이번에 좀더 구체적인 세부 로드맵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원플래닛 서밋 행사에서 “테라 카르타는 자연, 사람, 지구를 세계적인 가치 창출의 중심에 놓는 회복계획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주 영국에는 ‘테라 카르타(Terra Carta, 지구 헌장)’가 큰 화제가 되었다. 영국 왕위 계승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가 발표한 환경판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이다.

https://www.instagram.com/p/CJ5g69HjJvz/?utm_source=ig_embed&utm_campaign=embed_video_watch_again

 

총 17쪽 분량으로 10개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기업이 따라야 할 100여개 권고사항이 담겨있다. 그는 “2050년 탄소중립은 너무 늦으며, 이를 앞당기기 위해 녹색 에너지, 탄소포획, 전기 항공기 등을 추진해야 하며, 생물 다양성 복원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블랙록, EY, 아스트라제네카, 슈뢰더, BP, 히드로 공항 등 유수의 기업들이 이미 지원을 약속했다.

테라 카르타의 일환으로, 찰스 왕세자는 ‘자연자본투자연맹(Natural Capital Investment Alliance)’을 조직했다. 내년까지 100억달러(11조원)을 조성, 생물 다양성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할 예정이다. 특히 중요한 지점은 탄소 가격을 매긴 것처럼, 자연자본 또한 가격을 매겨 회계에 반영시키겠다는 장기적인 포석이 깔려 있다.

EU에서는 지속적으로 비재무보고 지침이나 기후금융, 공급망 관련 규제 현안들의 진척사항이 나오고 있다. 유럽의 애널리스트들은 EU의 배출권 거래제(ETS)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휘발유 가격 급등으로 탄소가격이 이달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후 2021년과 2022년 유럽 탄소 시장 평균 가격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로이터가 8명의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EU 탄소가격은 2021년 톤당 평균 39.24유로, 2022년 평균 46.24유로로 예상했다. 이는 작년 10월 전망치보다 각각 3.6%, 11.1% 상승한 것이다.

이런 장황한 설명을 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 인식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후위기나 탄소중립과 관련된 질문은 전무했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은 기자 회견 이후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기후나 그린뉴딜 질문은 전무. CNN기자가 현재 상황 설명하면서 지나가듯 climate change 언급한 게 전부.(홍콩 언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지나가며 ‘기후’란 단어가 들어가지만 이것도 배경설명 수준). ‘뉴딜’은 아예 질문도 답변도 없었다. ‘한국판 뉴딜’이든 ‘그린 뉴딜이든….(국정우선 과제 맞나?)”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청와대

대통령이 아니라, 어떤 오피니언 리더그룹이든, 이니셔티브든, 연대조직이든 지속가능성과 기후변화 등 거시적인 글로벌 흐름, 이에 따른 국내 에너지와 경제산업에 미치는 영향,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는 우리의 자세 등을 준비하는 ‘운동(movement) 혹은 어젠다(Agenda)’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부처에서 발표하는 정책들은 많고, 개별기업들의 규제와 위기 대응은 빨리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ESG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 존재하는 그것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큰 그림’의 어젠다 확산이 잘 안 보여 안타깝다.

박현주 미래에셋대우 회장은 최근 “과거 ESG가 규제의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미래 주요 성장축 중 하나”라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게 태양광, 전기생산을 넘어서는 혁신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말 그대로 ESG는 모든 축이 바뀌는 미래의 패러다임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언어 같기도 하다. 그것이 기회로 작동하기도 하고, 위기도 작동하기도 한다. 미국과 EU, 중국까지 탄소국경세를 도입하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업종 기업들은 추가로 최대 1조8000억원대를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이미 EU의 팜오일 수입 규제로 인해 인도네시아에 이어 말레이시아까지 “우리 경제 다 죽는다”며 WTO에 제소를 하는 마당이다.

어떤 나라의 지속가능성 이슈가 또 다른 나라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ESG를 둘러싼 전쟁이라고 부르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