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흑연' 전쟁...북미 광산업체는 관세 요구, 미 정부는 K배터리 흑연 규제 유예
중국산 흑연을 둘러싼 전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형국이다.
로이터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북미 흑연 광산업체에서 중국산 흑연제품에 관세 부과토록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 3일에는 "미 정부가 중국산 흑연이 포함된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미국 인플레이션 저감법(IRA) 규제를 2년간 유예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9일에는 "중국산 흑연 유예조치에 한국 배터리 기업이 환호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중국은 전세계 흑연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지난 2022년 전체 음극재용 흑연 2억4100만달러(약 3300억원)어치 가운데 93.7%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10월 고순도 천연흑연 등의 수출을 통제하겠다고 발표했고, 12월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미국의 반도체 기술 제재에 맞서, 중국도 공급망 자원을 무기화하는 것으로 읽혀졌다. 미국 또한 중국산 흑연이 포함된 전기차 배터리에 대해 IRA 규제를 하기로 했으나, 현실적인 대체 광물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2년의 유예기간을 둔 것이다.
이는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에 대한 공급망 안보 이슈로 인해, 배터리 기술 개발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북미 지역 흑연채굴업체, 중국산 흑연에 25% 관세 부과 로비
로이터에 따르면, 북미 지역의 흑연 채굴업체들은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중국산 흑연 제품 3개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도록 로비 활동을 전개해왔다.
북미 지역 흑연 채굴업체들은 “중국산 흑연이 자유롭게 북미 지역으로 유입되면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저렴한 흑연을 공급 받을 수 있겠지만, 향후 오프테이크계약(장기구매계약)을 피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본 조달 기회를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정부는 이달 중 중국산 흑연을 무역법 301조 관세 부과 대상 광물 목록에 포함할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301조 관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당시 도입된 관세로, 중국의 기술이전, 지적 재산권 등이 불합리하고 차별적이라면서 도입했으며 중국은 이에 강력 반발해왔다.
한편, 테슬라와 국내 배터리업계는 그동안 중국산 흑연에 관세 면제를 촉구해왔다. 테슬라는 2021년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중국산 흑연에 대한 관세 면제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3건 제출하기도 했다.
미 정부, 2년간 중국산 흑연 포함 전기차 배터리 규제 유예
북미 흑연 채굴업자들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미 정부는 중국산 흑연이 포함된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미국 인플레이션 저감법(IRA) 규제를 2년간 유예했다. 국내 배터리 및 자동차 제조업계는 공급망을 다변화할 시간이 확보된 것이다.
당초 전기차 세액공제 및 해외우려기관(FEOC) 규정에 의해 24년 1월 1일부터 중국산 흑연 사용이 금지되면 단기간 내 배터리 생산을 위한 대체 흑연 공급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협회와 업계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번 결정으로 이러한 제재는 2026년 말까지 유예된다.
흑연은 전기차 배터리 음극재의 필수 광물이다. 배터리·음극체 제조업체부터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업체)까지 현재 글로벌 시장의 70% 이상이 중국 흑연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추출 및 가공과 관련된 심각한 환경 영향에도 불구하고 첨단 정제 능력과 저비용 생산을 바탕으로 중국이 전 세계 흑연 생산량의 99%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미 재무부와 민관파트너십을 체결한 비영리단체 SAFE 중요광물 전략센터(SAFE's Center for Critical Minerals Strategy) 아비게일 헌터 전무이사는 “흑연 조달에 대한 2년 면제를 결정한 것은 일시적이어야 한다”며 “중국 외 공급업체들이 이에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을 제공하는 것일 뿐 중국을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에서 몰아내는 전반적인 추세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
K-배터리, IRA 보조금 날릴 뻔
이번 개정 이전에는 중국산 흑연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 배터리 제조업체들이 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 초기 정책은 전기차 주요 배터리 광물 및 배터리 부품에 대해 차량 당 최대 7500달러(약 1025만원)의 세액 공제를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미 정부는 내년부터 자동차 제조업체가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등에서 조달한 배터리 부품과 중요 광물을 사용할 때 세액공제를 제한하는 해외 우려 대상(FEOC) 규정을 적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관련 산업계의 협상과 옹호 끝에 중국산 흑연을 배터리에 사용하는 전기차에 불이익을 주던 IRA법의 특정 조항을 2년 간 유예하는 데 합의했다.
지난해 한국의 3대 배터리 생산업체인 LG 에너지 솔루션, 삼성SDI, SK 온은 미국 시장에서만 10조 원이 넘는 배터리 판매 수익을 올렸다.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이들 업체의 배터리를 탑재한 30개 이상의 전기차 모델은 내년부터 미국 보조금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전기차 수요 및 소비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현대자동차, BMW, 폭스바겐 등 전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현지 공급망을 구축하고 상업적 생산과 원료 공급처 전환까지 실현하려면 최소 3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를 대표하는 ‘자동차 혁신 연합(the Alliance for Automotive Innovation)’ 대표 존 보젤라는 새로운 재무부 규정이 "전기차 배터리의 중요 광물 공급처에 대해 일시적인 유연성을 제공한 것은 글로벌 공급망의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배터리 업계는 “중국이 흑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배터리 및 OEM, 특히 한국과 일본의 주요 배터리 제조업체의 음극재 원재료 공급원이 차단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 소재 대체 가속화하
한국 정부, 2027년까지 배터리 공급망 다각화 지원
미 재무부에 따르면, 제조업체가 2027년까지 조달이 불가능한 특정 배터리 재료를 일시적으로 FEOC 준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으며, 그때까지 준수할 계획을 입증하면 된다.
이번 중국산 흑연 사태는 대체 소재 개발을 가속화하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주에 본사가 있는 실라 나노테크놀로지 공동설립자인 베르디체프스키 CEO는 "중국 흑연 대신, 배터리 음극재의 핵심소재로서 실리콘의 개발과 사용을 가속화할 수 있다"며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이 실리콘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고 미국의소리(VOA)에 밝혔다.
흑연 대신 실리콘을 사용하면 배터리 무게당 용량이 최대 10배 이상 높아지고, 급속 충전 설계도 쉽다고 한다. SKC는 2021년 영국 넥세온에 지분을 투자해 기술을 확보하고, 1분기 중 실리콘 음극재 시생산 시설을 완공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도 실리콘 음극재 기술을 보유한 프랑스 엔와이어즈와 협력하고 있다.
한편, 미국 정책 전환에 대응해 지난 8일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관련 미관합동회의’를 열어 흑연 공급망 자립을 위해 국내 전기차 제조업체에 9조7000억원의 정책 금융을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기업들이 2027년부터 흑연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세액공제 요건 충족을 위한 핵심광물 비중 산정시 정확한 부가가치 계산하는 등 IRA법의 요건을 충족하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나아가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와 광물 안보 파트너십과 같은 전략적 국제 파트너십을 통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국가로부터 필수 광물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촉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