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자원, 더 이상 공짜는 없다… COP16, 생물다양성 보상 기금 논의

2024-08-21     이재영 editor

의학, 제약, 바이오, 농업 등 생물 데이터 관련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9일(현지시각) 최근 생물다양성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풍부한 생태 환경을 보유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적 보상 요구도 본격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생물다양성 보존에 대한 비용을 요구하고 나섰다. / 픽사베이 

 

생물다양성, 재무적 성과의 기반...

현재 체계로는 정당한 보상 분배 어려워  

생물다양성은 막대한 재무적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이어트약의 기원 또한 남아프리카 칼리하리 사막 지역 선인장 후디아(hoodia)에서 나왔다. 1996년 영국 제약기업 파이토팜(Phytopharm)이 지역 원주민인 산(San) 부족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후디아를 먹는 것을 보고, 포만감을 주는 물질을 추출해 상업화한 것이다. 

문제는 파이토팜은 그들에게 어떠한 경제적 보상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원주민 공동체의 지적 재산과 해당 지역의 생물다양성이 재무적 성공에 크게 기여했는데도 수익은 기업이 독차지한 것이다. 이 사건은 환경단체 등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UN은 1992년 생물다양성 협약을 체결하는 등 생물자원으로 발생한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개발도상국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UN이 주재하는 협약이 실질적인 이익 공유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도 개발도상국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과거 생물 자원은 직접 재배하여 이송하거나, 씨앗이 되는 종자를 확보해 현지화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특정 식물이나 미생물을 상업화하려면 일단 물리적으로 샘플을 채취해 자국으로 가져가 관리해야 했다는 의미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DNA 등 원하는 생물의 유전자 정보를 손쉽게 디지털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디지털서열정보(DSI)다. 연구기관이나 기업들은 현지의 샘플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 손쉽게 신약 및 유전자 변형 농작물 개발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개발도상국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물다양성 보상 기금’ 마련을 주장하고 있다. 오는 10월 개최되는 제16차 유엔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6)에서는 이러한 기금 마련을 위한 자금 조달 방안이 논의될 예정이다. 저소득 국가 생태계로 인한 생물학적 발견의 공정한 이익 분배를 위해서다.     

기금이 제도화된다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금 조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제약, 생명공학, 농업 등 유전자 데이터에 의존하는 주요 산업들의 수익은 연간 1조달러(약 1333조7000억원)를 넘어선다. 이에 아프리카 국가들은 생물 유전자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기업들의 전 세계 소매 판매액 중 1%를 생물다양성 보상 기금에 기여하도록 요구할 계획이다.

다만 12~16일(현지시각)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생물다양성 COP16 사전 협상 회의에서 실무 워킹그룹의 공동 의장을 맡은 윌리엄 록하트(William Lockhart)는 “지금 당장 거대한 국제적인 조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록하트 공동의장이 기금에 대한 기대치를 완화시킨 이유는 제약업계나 유전공학계의 반발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5차 유엔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COP16)에서 영국 제약그룹 GSK(GalaxoSmithKline)는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제정된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Kunming-Montreal Global Biodiversity Framework)’가 신약 연구 및 생명공학에 추가적인 부담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새로운 규제가 도입되면 유전자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이를 사용하기 위한 절차 및 비용이 더 많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GSK는 이러한 프레임워크가 공중보건에 필요한 신약 개발이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대응에 취약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의료 등 AI 업계에도 유의미한 영향...

생물 데이터 거래를 위한 플랫폼 사업도 등장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한 기금은 인공지능(AI) 업계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원격진료 등 디지털 의료가 부상하고 있는 지금, 바이오 데이터에 대한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오픈 AI의 챗GTP 학습에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동원된 것처럼, 의료 AI 개발을 위해서는 식물, 동물, 미생물 등 전 세계의 방대한 바이오 데이터가 필요하다.  

록하트 공동의장은 "유전자 데이터를 활용한 AI 연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생물다양성 보장이 선제되어야 한다"며 UN 기금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사업적 기회로 포착한 기업도 있다. 런던 소재 스타트업 베이스캠프 리서치(Basecamp Research)는 향후 생물 데이터 수요 증가를 대비해 글로벌 바이오 데이터 공유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개발도상국 이해관계자들이 플랫폼에 생물 데이터를 업로드해놓으면, 기업이나 학계 관계자들이 정당한 이용료를 지불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베이스캠프 측은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인 카메룬 정부와 정식으로 협정을 체결, 4개 지역에서 유전자 샘플을 채취해 디지털화하기로 했다. 베이스캠프가 이러한 방식으로 채취한 유전자 데이터로 AI 모델을 학습시켜 상업화한다면, 카메룬 정부에 정당한 로열티가 지급된다.  

베이스캠프 측은 로열티 비율이 이번 COP16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제시한 금액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