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 멕시코 관세, 전기차 배터리 여권, 지열
안녕하세요. 독자여러분. 미국에선 ‘트럼프’, 한국에선 ‘탄핵’이라는 2개의 이슈 덩어리가 우리의 모든 눈과 귀를 채우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공급망 붕괴의 시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5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지만, ‘뉴욕타임스’ 베테랑 기자인 피터 S. 굿맨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흥미로워 쉽게 읽힙니다. 도요타 방식으로 유명한 ‘적기생산(JIT, 무재고시스템)’이 왜 한계에 도달했는지, 공급망 내 노동자들의 처우가 물품 운송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중국 닝보항부터 남미까지 현장 곳곳을 관통하는 사람들과 시스템 이면을 추적합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다 코로나 이후 공급망 리스크의 핵심 원흉이 될 때까지, 이득을 본 미국 월스트리트의 금융권과 단기보상에 집착한 경영진, 규제 완화로 호응한 정부기관까지 적나라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미중 갈등과 트럼프 2.0시대의 ‘관세 전쟁’은 공급망의 리스크를 점점 더 높이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자국 중심으로의 공급망 재편’이라는 그림이 제대로 완성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FT의 한 칼럼니스트는 요즘 상황을 두고 “트럼프의 등장으로 거래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칼럼은 공급망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트럼프의 멕시코 관세, 부메랑 효과는?
한달 연장하기는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제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업종은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계입니다. 아예 생산 기지를 동남아시아로 이전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스미토모 일렉트릭은 자동차 부품 외에도 데이터센터, 반도체 소재, 해저 케이블 등의 세계적인 강자입니다. 스미토모 일렉트릭(Sumitomo Electric)의 이노우에 오사무 CEO는 FT에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미국 경제의 목을 조이는 것과 같다"며 "멕시코를 중심으로 구축된 자동차 부품 공급망이 붕괴될 경우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멕시코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자동차 부품 수출국으로, 연간 1260억달러(약 168조원) 규모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 중 42%가 미국으로 수출됩니다. 전기차(EV)용 모터, 와이어 하네스, 에어백 등 노동집약적인 부품 생산이 활발하지요. 특히 미국 기업들은 멕시코 자동차 산업 투자에서 약 30%를 차지하며 깊이 연계돼 있습니다.
일본계 글로벌 부품업체인 스미토모 일렉트릭과 야자키(Yazaki)는 와이어 하네스(Wire Harness)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와이어 하네스는 차량 내부의 전선 케이블을 하나로 묶어주는 필수 부품으로, 전 세계 자동차 4대 중 한 대에 장착될 정도로 필수적인 부품입니다. 멕시코는 저렴한 인건비와 미국과의 인접성 덕분에 이러한 노동집약적 부품의 생산 허브로 자리 잡았지만, 트럼프의 관세가 현실화되면 상황이 급변할 수 있습니다.
이노우에 사장은 "25%의 고율 관세가 부과될 경우, 우리는 동남아시아 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생산하는 제품에는 5%의 관세가 부과되는데, 설사 동남아 관세가 10~20% 수준으로 올라가더라도 멕시코보다는 유리한 조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 이전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노우에 사장은 "높은 최저임금과 인력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와이어 하네스 생산이 미국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습니다.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BMW와 폭스바겐이 현지 공장 폐쇄로 타격을 입은 사례를 언급하며 "전쟁이 끝나면 루마니아의 인건비 상승을 고려해 우크라이나가 생산 거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또한 모로코와 튀니지도 대체 생산기지로 고려되고 있습니다. 트럼프발 멕시코 관세 정책이 실현될 경우, 자동차 부품업계의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며 대규모 생산 거점 이동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볼보의 전기차 배터리 여권, 첫 출시
두번째 이야기는 전기차 배터리 여권(Battery Passport)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웨덴의 볼보(Volvo)는 2024년 말 출시한 럭셔리 전기 SUV ‘EX90’에 배터리 여권 시스템을 처음 도입했습니다.
배터리 여권은 배터리의 출처, 화학 성분, 탄소 배출량 등을 기록하는 디지털 식별 시스템으로, 이를 통해 재활용과 재사용을 촉진하고 배터리 공급망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습니다. EU는 2027년 2월부터 이를 모든 전기차에 의무화할 계획입니다.
예를 들면, 블록체인 관리 시스템을 통해 배터리 사용을 15년 동안 추적, 배터리의 성능 저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는 수명이 다해도 70% 이상의 충전 능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재생 에너지 저장소로 활용하면 배터리 순환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볼보는 2027년까지 전 차종에 배터리 여권을 도입할 방침이며, 일본의 닛산(Nissan), 혼다(Honda)도 EU 규정에 맞춰 도입을 예고했습니다. 중국 정부 역시 자국 배터리 공급망을 기반으로 한 배터리 여권을 개발 중입니다. EU는 배터리 재활용을 강화하기 위해 리튬, 코발트, 구리, 니켈 등의 회수 목표를 명시하고, 모든 배터리에 일정량 이상의 재활용 소재를 포함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미국 역시 배터리 여권 도입을 검토 중입니다. 미국 정부는 전기차 보조금을 지급할 때 북미에서 생산된 배터리를 장착한 차량에 한해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산 구매(Buy American)’ 원칙은 현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로 자리 잡고 있어 배터리 여권의 필요성은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배터리 여권 도입에는 여러 현실적인 과제가 따릅니다. 전기차 배터리의 화학적 구성과 제조 방식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기술 변화 속도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배터리 여권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도 문제입니다. 영국 기술업체 서큘러(Circulor)의 더글라스 존슨-포엔스겐 CEO는 “배터리 여권은 케이크 레시피와 같다”며 “각 재료(원자재)의 출처를 파악할 수 있지만, (배터리여권 규제를 지키기 위한) 추가적인 환경 비용도 함께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서큘러에 따르면, 볼보가 도입한 배터리 여권 시스템은 차량 1대당 약 10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남아 있지요.
또 금속과 광물의 출처를 어디까지 확보해야 하는지도 과제입니다. 공급망이 매우 복잡한데, 어떻게 모든 회사들로부터 정보를 얻을지 고민이라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EU의 규제완화 흐름이 배터리 여권에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의무적인 배터리 여권 및 재활용이 계속될지 지켜봐야 겠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뜰 친환경 에너지는 지열?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친환경 에너지가 대폭 후퇴할 전망이 나오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지열발전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차기 미국 에너지부 장관으로 지명된 크리스 라이트는 지열 에너지의 강력한 옹호자로, 해당 산업의 성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라이트는 석유·가스 서비스 기업인 리버티 에너지(Liberty Energy)의 창립자이며, 2022년에는 차세대 지열발전 스타트업인 퍼보 에너지(Fervo Energy)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한 인물입니다. 그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이해 충돌을 피하기 위해 퍼보와의 재정적 관계를 끊겠다고 밝혔지만, 지열 에너지를 “엄청난 잠재적 에너지원”으로 평가했습니다.
지열발전은 지하 균열에서 나오는 열을 이용해 전기 터빈을 구동하는 방식으로, 100년 이상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 전력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차세대 지열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캐피털(VC) 투자금이 몰리면서 저탄소 에너지원으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기존 석유·가스 시추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형태의 지열발전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퍼보 에너지는 석유업계에서 널리 활용되는 ‘수압파쇄(fracking)’ 및 ‘수평시추(horizontal drilling)’ 기술을 도입해 기존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범위에서 지열 에너지를 추출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팀 라티머 퍼보 CEO는 “그동안 지열발전은 석유·가스만큼의 자본 접근성이 부족해 기술 개발이 더딘 상태였다”며 “하지만 이제는 차세대 기술을 적용해 대규모 확장이 가능해졌다”고 말합니다.
퍼보는 현재 구글을 포함한 대형 기업 및 유틸리티 회사와 500MW(메가와트) 이상의 전력 구매 계약(PPA)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남부 캘리포니아 에디슨, 네바다의 NV 에너지 등도 퍼보의 지열발전을 전력 공급원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특히,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데이터 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지열발전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열발전은 24시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 공급 불확실성이 큰 태양광·풍력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전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지요.
미국 에너지부(DOE)에 따르면, 최근 지열발전의 전력 구매 계약 가격은 MWh(메가와트시)당 약 70~100달러 수준으로, 태양광(57달러), 풍력(66달러)보다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기술 개선과 비용 절감을 감안하면, 2050년까지 지열이 전 세계 전력 수요 성장의 최대 15%를 충족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현재 미국 내에서도 지열발전이 활용될 수 있는 지역은 ‘미시시피 서쪽’ 대부분의 지역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개발 비용이 높아, 위험성을 감수할 투자 자본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기존 석유·가스 업계도 지열발전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청정 에너지원 중에서도 지열은 기존 셰일가스 시추 기술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어, 기존 오일·가스 장비와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퍼보는 현재 셰일오일·가스 생산업체가 사용하는 굴착 장비를 활용해 지열발전소를 개발하고 있으며, 기존 프래킹 기술을 기반으로 지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기술 발전을 감안하면, 미국은 현재 5500GW의 지열발전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미국 전체 전력 발전량의 4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보고서는 또한 “2035년까지 지열발전의 발전 단가를 MWh당 45달러로 낮춰 태양광·풍력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오랫동안 저평가 되어왔던 지열 발전이 과연 급부상할까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위에선 온통 트럼프 등장 이후 ESG가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만 들립니다. 4년만 기다리면 된다는 자조섞인 소리도 들립니다. ESG가 가라앉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슈가 더 부각돼보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 이슈에 더 눈길이 갑니다. 사람들의 뇌는 늘 인지 왜곡과 편향이 발생합니다. 보고싶고 듣고싶은 뉴스만 더 끌리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뚝심’이 필요해보입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