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법원, ‘송유관 시위‘ 그린피스에 1조원 배상 평결
미국 노스다코다주 법원이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약 6억6000만달러(약 9680억원)를 배상해야 한다고 평결을 내렸다. 이번 평결은 노스다코타주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Dakota Access Pipeline) 건설을 둘러싼 8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나왔다.
평결이란 배심원단의 결정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최종 판결은 추후 노스다코타주 남중앙사법지구 1심 법원 판사가 내릴 예정이다.
19일(현지시각) 로이터,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 노스다코타주 맨던(Mandan)에서 열린 재판에서 9인 배심원단은 텍사스 기반 송유관 운영사 에너지 트랜스퍼(Energy Transfer)의 손을 들어줬다. 배심원단은 그린피스와 그린피스 USA가 송유관에 대한 명예훼손, 공모, 물리적 손상을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배심원단,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손상 책임 인정
이번 소송은 2016년 송유관 건설 반대 시위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국 원주민인 스탠딩록의 수(Standing Rock Sioux) 부족이 식수 오염과 주권 침해를 우려하며 반대 운동을 벌였고, 10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참여했다. 에너지 트랜스퍼는 2017년 연방법원에 그린피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됐고, 이후 노스다코타주 법원에서 다시 소송을 진행해 이번 평결을 받아냈다.
에너지 트랜스퍼 측은 그린피스가 시위를 주도하며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시위대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회사 측은 시위로 인한 공사 지연, 보안 강화 조치, 평판 손상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반면, 그린피스는 자사의 미국 조직인 그린피스 USA가 송유관을 반대하는 다수의 단체 중 하나였을 뿐이며, 폭력 행위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공사 지연은 그린피스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에너지 트랜스퍼 공동 창립자인 켈시 워렌(Kelcy Warren)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회사 측은 “이번 평결은 노스다코타주와 법을 준수하는 모든 미국인의 승리”라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월 취임 직후 해당 송유관 프로젝트를 신속하게 추진할 것을 명령했으며, 같은 해 6월 마침내 운영이 시작됐다. 그 해 9월, 트럼프 대통령은 노스다코타를 방문해 송유관 개통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우리는 송유관을 열었고,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했다”고 발언했다.
그린피스는 재판이 열린 노스다코타주의 법원이 불공정한 평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주장하며, 소송 장소 변경을 요청했으나 기각됐다. 맨던는 노스다코타 최대 정유시설이 위치한 곳이며, 에너지 트랜스퍼는 2019년 지역 도서관과 공원을 위해 300만달러(약 44억원)를 기부한 바 있다.
노스다코타 주지사 출신으로 현재 미국 내무장관을 맡고 있는 더그 버검(Doug Burgum)은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해 왔다. 그는 2019년 송유관 인근 시위를 최대 5년 형으로 처벌하는 법안을 주지사로서 서명했다.
전략적 봉쇄 소송(슬랩 소송)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 위축 우려
전문가들은 이번 평결이 환경 및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비영리법센터(ICNL)에 따르면 2017년 이후 20개 이상의 주에서 송유관 주변 시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그린피스는 이번 평결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슬랩 소송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반발하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또한 유럽연합(EU)에서 지난해 채택된 EU의 반(反)슬랩 소송 지침(Anti-SLAPP Directive)에 따라 네덜란드에서 에너지 트랜스퍼를 상대로 별도의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슬랩(SLAPP) 소송이란 ‘전략적 봉쇄 소송(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의 줄임말로, 기업 또는 기관이 공익 활동가나 언론인의 공익적 문제 제기를 위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기하는 '입막음 소송’을 뜻한다.
EU의 반슬랩 소송 지침은 슬랩 소송을 남발하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소송 절차가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법원은 슬랩 소송 피해자가 부담한 소송 비용과 손해에 대한 보상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현재 미국 35개 주에서 슬랩 소송을 제한하는 법이 도입됐지만, 노스다코타주는 관련 법이 없다. 미국 의회에서도 연방 차원의 슬랩 방지법 제정을 위한 초당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린피스는 “이번 평결이 미국 내 활동을 사실상 파산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면서도 “석유 기업에 맞서는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