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실물경제 충격 본격화…글로벌 기업들 자산가치 조정 나섰다
세계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4℃ 상승할 경우, 전 세계 1인당 소득이 현재보다 40% 가량 감소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일(현지시각) 영국 가디언은 이번 연구를 인용, 기존 경제모델들이 기후변화가 공급망 전체에 미치는 충격을 크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구를 이끈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티모시 닐(Timothy Neal) 박사는 "온도 상승이 2℃로 제한되더라도 평균 GDP는 16% 감소할 것"이라며 "이는 기존 예측치 1.4%보다 훨씬 높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기업들, 기후 리스크를 재무제표에 수치화
실물 경제에 기후 충격 전이가 가시화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기후 리스크'를 손상차손, 감가상각비, 충당금 등 구체적 회계 항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자산 가치 하락 가능성이나 미래 지출 위험 등을 미리 장부상에 반영해두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비용을 미리 계상해두면 예기치 못한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그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영국 에너지 기업 BP는 2024년 한 해 동안 총 51억달러(약 7조4760억원)의 자산 손상차손을 재무제표에 반영했다. 이 가운데 약 15억달러(약 2조1988억원)는 4분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으며, 일부는 BP가 지분을 보유한 파나마리칸 에너지(Pan American Energy) 관련 자산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다.
BP는 이 손상차손의 주요 원인으로 유가 전망 하향, 인플레이션율 조정, 미래 수익의 현재 가치를 계산하기 위한 할인율의 변화 등을 들었다. 주목할 점은, 자산 가치 평가에 기후 전환 리스크를 반영한 장기 시나리오를 적용, 기존 장부에 기재돼 있던 자산 가치를 현실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후 전환 시나리오에 따라 미래 수익의 증감 여부를 반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BP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50년 탄소중립(Net Zero by 2050)’ 시나리오와, 금융시스템 녹색화 네트워크(NGFS)의 전환 시나리오에 따라 향후 시장 환경을 전망하고 있다. NGFS은 각국의 중앙은행과 금융감독당국들이 모여 결성한 국제 협의체다.
BP는 “탄소 가격이 톤당 80~100달러(약 12~15만원)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가정과, “장기적으로 에너지 수요가 감소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반영해 각 자산의 ‘회수가능금액’을 재추정했다. 이 과정에서 석유 및 가스 채굴 자산을 중심으로 미래 수익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 해당 자산들의 현재 장부가치를 하향 조정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BP는 석유·가스 및 관련 투자자산 일부의 사용 가능 기간(내용연수)도 단축시켰다. 이에 따라 감가상각비도 전년보다 11억달러(약 1조6124억원) 증가한 총 68억달러(약 9조9681억원)로 반영했다. 해당 자산의 가치가 이전보다 더 빨리 감소할 것으로 보고, 회계상 비용 처리를 앞당긴 것이다.
BHP, 알리안츠 등도 감가상각, 손상차손 반영
호주 광산기업 BHP 또한 2024년 연례보고서에서 총 12억4000달러(약 1조7590억원)의 감가상각 및 손상차손을 인식했다. 이 중 서호주 니켈 자산에서만 3억8000달러(약 4397억원)의 손상차손이 발생했다. BHP는 보고서에서 "자산 가치 평가 시 물리적 리스크(홍수, 산불 등)와 규제 변화 등 기후 리스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BHP는 자체 개발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분석 프레임워크(Climate Change Scenario Analysis Framework)'를 통해 2.6℃ 및 1.5℃ 시나리오에 따른 수익성 평가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향후 탄소세 부담 가능성을 반영해, 톤당 80~100달러(약 12~15만원) 수준의 탄소 비용을 자체적으로 설정하고 자산의 미래 현금흐름을 조정했다. 주요 분석 대상 자산은 칠레 동광과 호주 퀸즐랜드 석탄광 등이다.
글로벌 금융그룹 알리안츠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증가를 반영, 12억유로(약 1조8990억원)의 신용손실충당금(Provision for credit losses)을 계상했다. 신용손실충당금이란 대출, 채권, 투자자산 등에서 미래에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금액을 미리 장부에 비용으로 반영해두는 항목을 말한다. 즉, 알리안츠는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심화되자 자산 건전성 확보를 위해 보험금 지급 증가 가능성, 기후 취약 지역에 투자한 채권 자산의 회수 가능성 저하 등을 재무제표에 미리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알리안츠는 2024년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자연재해 위험이 높은 지역의 부동산·인프라 자산에 대해 1억2000유로(약 1582억원) 규모의 손상차손도 반영했다. 또한 기후 리스크가 높은 채권자산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알리안츠는 IAIS(국제보험감독기구)와 NGFS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보험금 지급 패턴과 자산 평가의 리스크를 모델링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석 결과를 기술준비금 설정과 신용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정성적 분석'에 머물러... 재무제표 반영은 미흡
반면 국내 주요 기업들은 기후 리스크를 주로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고 있다. NGFS, 기후 관련 재무정보 공개 태스크포스(TCFD) 등 글로벌 가이드라인에 맞춘 시나리오 분석을 실시하고, 고온·폭우로 인한 피해 규모(인프라 손상, 전력 요금 증가, 에너지 비용 증가, 물류 차질 등)를 전환 리스크로 제시하고는 있으나, 이를 회계적으로 계상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성적 접근은 향후 재무 공시에서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 국제회계기준(IFRS) 제1036호(자산손상), 제1037호(충당부채) 등 여러 회계 기준은 기후 리스크가 미래 현금흐름에 영향을 미칠 경우 이를 수치화해 반영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회계기준원 유하은 연구원은 'ESG가 재무보고/재무제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전략적인 계획과 위험관리를 통해 미래 현금흐름, 판단, 가정 등에 기후 리스크를 반영하고, 이를 재무보고 및 재무제표와 연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ESG 의무공시 일정을 기존 2025년에서 2026년 이후로 유예했다. 금융위는 향후 단계적으로 의무공시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며, 글로벌 공급망 편입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