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냐 S냐, 갈림길에 선 전기차 전환 선언
미국의 전기차 생산 기업 테슬라의 성공을 시작으로 기존의 내연기관차 생산 업체들이 너도나도 전기차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있다. 포드는 2030년부터 유럽에서 전기차만 내놓겠다고 밝혔고 폭스바겐은 2029년까지 전기차 75종을 출시해 전기차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아는 미래 모빌리티를 전사적 목표로 사명까지 바꿨다.
얼핏보면 전기차 전환 선언 목표는 E(환경)에 딱 맞는 ESG 경영 선언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E냐 S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여있다. 전한이 가속화 될수록 일자리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내 현대차만 보더라도 현대자동차를 떠받들고 있는 1차, 2차, 3차 협력업체까지 고용 인원은 무시무시한 숫자다. 최근 전기차 아이오닉 5를 내놓으면서 생산인력을 12% 감축한 사례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전기차 전환 속도 빨라질수록
내연기관차 생산 일자리는 감소
부품의 수가 3만여 개에 이르는 내연기관차에 비해서 전기차는 1만 5천여 개에 불과하다. 약 30%의 부품이 사라져 제작과정이 단순해지면서 자동차 조립에 투입되는 인력이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보다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에 따르면 세계 자동차 판매 1위 기업인 독일의 폭스바겐은 전기차 전환 선언으로 5000여명 인원 감축을 했다. 전기차와 차량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2023년까지 운영비를 5% 줄여 2021년까지만 고용 동결 기간을 연장하고, 앞으로 외부 고용은 전기차 개발과 관련된 인력에게만 적용한다고 밝혔다.
인원 감축을 통해 얻은 재원으로 전기차 개발, e- 모빌리티, 하이브리드 자동차, 소프트웨어 기반 차량 운영 체제 및 자율 주행 기술에 향후 5년간 730억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폭스바겐의 인사 책임자인 건너 킬리언은 회사의 "지속적인 엄격한 비용 관리"를 통해 경영진이 "미래에 필요한 투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자리 감소는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입장이다.
미국의 자동차 기업 포드 역시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에 있는 공장들을 폐쇄하고 브라질 공장까지 폐쇄를 예고했다. 뿐만 아니라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투자해 400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 독일의 쾰른 공장을 전기차 조립공장으로 전면 개조하면서 전기차로의 전환 속도를 올리고 있다.
스튜어트 롤리 포드 유럽법인 사장은 "90년 동안 유럽 사업 본거지였던 독일 쾰른 공장을 개조하기로 한 것은 포드가 지금까지 결정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면서 "전기차와 함께하는 미래가 성장 전략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 폐쇄로 유럽에서는 1만2000개의 일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국내에서는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 5가 출시를 앞두고 3만 대가 넘는 사전 계약이 이루어지면서 국내 자동차 사전 계약 신기록을 세웠지만 내부에선 진통을 겪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에 비해 부품 수가 30% 줄어드는 탓에 아이오닉5 생산에 투입될 인원 축소는 불가피하다는 사측의 입장에 노조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양측은 아이오닉5를 생산하게 될 울산 1공장 2라인 근로자 800명 중 100여 명을 조립라인이 아닌 다른 일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만 진통은 끝나지 않았다. 엔진·변속기 공장 인원 감축은 아직 협의 중이기 때문이다. 울산 1공장과 엔진·변속기 공장 근로자는 각각 3500명, 5000명에 달한다. 더구나 하반기에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 전기차 JW 출범을 앞두고 있어 인력 감축이 필수적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기아차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있다. 이달 중 전기차 EV6 공개 예정인데다가 7월엔 국내 뿐 아니라 유럽 시장에서 본격 판매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미 지난해 기아차 노조는 현대모비스 친환경차 부품 공장 신설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기아차 노조는 "노조원의 고용안정과 직결되는 제1 고용안정 사업"이라며 직접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외부 생산 시설로 옮기면 기아차 인력 감소는 정해진 수순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 일자리 보호 위해
하이브리드 차량 생산 허용
이처럼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전기차로의 산업 재편에 대해서 자동차 업계에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BMW 그룹 작업 위원회 의장인 맨프리드 샤치는 “EU의 배출 제한이 너무 엄격하게 설정되면 2025년까지 내연기관 자동차가 종식될 것이고 이전에 본 적 없는 실업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독일에서는 2030년 전기차 전환 목표로 인해 수십만 명의 고용이 사라질 수 있다는 추정 결과가 나오고 있다.
미 의회조사국은 보고서에서 내연기관 자동차의 핵심 동력 기관인 파워트레인의 부품을 만드는 약 15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향후 10년 이상 동안 전기 파워트레인이 기존의 내연기관 파워트레인을 대체한다면 생산직과 엔지니어링직 모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조사국은 "의회가 국내 전기차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 자원을 투자하고 기존 법안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내연기관차 관련 산업에 존재하는 일자리보다 전기차 관련 일자리가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을 재교육시켜 노동조합의 임금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고용 형태로 전기차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안도 내놨다.
첨예하게 얽혀있는 일자리 문제로 영국 정부는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추는 결정까지 내렸다. 작년 12월 영국 정부는 자국 자동차 제조 산업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2030년까지 가솔린과 디젤 신차 판매를 단계적으로 중단하되 2035년까지 일부 하이브리드를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2030년까지 내연기관차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한 지 몇 시간 후에 '배기가스 제로(Zero)로 상당한 거리를 주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면' 허용한다는 조항을 넣으면서 사실상 하이브리드 차량의 생산을 허용한다는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당초 일본의 자동차 제조 기업 닛산은 영국에서 생산 철수 의사를 밝혔지만 영국 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에 닛산은 내년부터 기존의 영국내 선더랜드 공장에서 카슈카이의 하이브리드 차종을 생산하기로 재합의했다.
영국 정부는 앞선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내 자동차 판매량 감소와 브렉시트의 불확실성으로 취약해진 영국 내 자동차 공장의 네트워크 보호를 위해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2030년까지 내연기관차를 생산하지 않도록 하는 기존의 계획을 완전히 훼손한다"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영국 정부는 최선의 조치라는 입장이다. 레이첼 매클런 교통부 장관은 파이낸셜타임스의 미래 모빌리티 서밋에서 "우리는 이 산업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이 접근법을 택했다"며 "하이브리드 자동차 또한 나중에 시민들이 전기차를 구매 장벽을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