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경의 ESG 딥다이브】지속가능보고서 시즌, 왜 여전히 같은 고민을 반복할까
상장기업의 ESG 담당자들은 매년 이맘때 지속가능보고서 작성에 여념이 없다. 적게는 80장 많게는 100장을 훌쩍 넘는 보고서를 기획하고 작성하고 검증까지 받다 보면 보통 5~6개월의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매해 반복되는 작업이지만 보고서 발간 작업이 끝나고 나면 많은 담당자들은 한동안 맥이 풀린다고들 한다.
2021년부터 ESG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금융위원회가 유가증권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지속가능보고서 의무공시 도입 로드맵을 발표하며 과거 몇십 건에 불과했던 지속가능보고서 발간 숫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2024년 거래소 포털에 자율공시된 보고서 발간 건수는 200건을 상회한다. 공공기관이 작성하는 보고서까지 포함하면 매해 300건이 넘는 지속가능보고서가 발간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기업들의 보고서가 늘어난 만큼, 조직 내부의 ESG 인식과 실행도 함께 깊어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형화된 ESG 보고서, 기업 고유 철학과 가치는 찾기 힘들어
300건이 넘는 보고서가 나오지만 보고범위와 개요, CEO 인사말, 이중중대성 평가 결과 등 별반 다를 것 없는 목차에, 부록은 GRI나 SASB 인덱스, 각종 지표 등으로 구성이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담당자들은 매해 이를 어떻게 차별화할 지를 고민한다. 지난해 넣지 못했던 기후공시를 추가해 보고, 작년보다 디자인을 더 세련되게 바꿔도 본다. 평가사가 새롭게 지표를 구성하면 그 항목을 새롭게 구성해 넣기도 한다.
하지만 수많은 이니셔티브와 평가 기준에 맞춰 작성된 보고서는 점점 더 구조화되고 정형화되어 가는 추세다. 기업 고유의 ESG 이슈에 대한 철학과 가치는 정형화된 보고서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조직이 ESG 이슈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진단과 해석보다는 외부 기준이 요구하는 형식에 맞춘 성과 위주의 텍스트가 보다 일반적이다.
조직 내부에서 ESG에 대한 실질적인 변화나 진정성 있는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다 보니, 해마다 바뀌는 외부 요구사항을 반영해 몇몇 항목을 추가하거나 문맥만 달리하여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식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콘텐츠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창작의 노력은 점점 부담이 되고, 결국 보고서는 '같은 내용을 달라 보이게 만드는' 작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내부에서도 읽히지 않는 지속가능보고서…실행 열쇠는 경영진 참여
지속가능보고서는 단순한 대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넘어, 조직의 전략과 리스크 대응, 그리고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도구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보고서를 넘어, 전사적 실행과 내재화의 출발점이 될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고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중중대성 평가는 본래 기업의 재무 리스크와 사회·환경적 영향을 통합적으로 진단하고 전략화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부서 간 정보가 파편화되어 있어 이슈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일부 실무자 중심으로 절차가 진행되거나 형식적인 응답에 그치는 경우가 상당하다. 외부 이해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정보 접근이 제한적이어서,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단편적인 관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작성된 보고서임에도 ESG담당 부서를 제외한 기업 내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해당 보고서를 읽지 않으며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ESG를 다루는 기업의 태도와 관련 깊다. 만약 ESG 이슈가 경영진과 각 부서에서 정기적으로 논의되고 활동 상황을 점검하는 체계가 정착되어 있다면, 보고서는 자연스럽게 조직 전체에 공유되고 실무에 활용되는 문서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ESG 이슈에 실질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임원과 팀장급 이상의 리더들이 평가 프로세스에 직접 참여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슈에 대한 인식과 책임이 조직 전반으로 확산되며, 평가에 따른 기회와 위험이 실제 전략 및 조직의 운영과 연결될 수 있다.
수치만으론 부족한 ESG, 가치와 과정이 핵심
최근 ESG성과를 재무지표처럼 수치화하려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고 이는 분명 필요하지만, ESG경영은 단순히 수치로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의 결과 못지않게 ‘왜 그렇게 했는가’, ‘어떻게 실행했는가’라는 가치관과 과정이 보다 중요하다. ESG는 회계처럼 정확하게 계량할 수 없는 철학과 조직문화, 가치의 영역을 포괄한다. 지속가능보고서는 그러한 조직의 문화와 가치를 담아낼 때 진정한 차별화가 가능하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ESG 실무자들이 느끼는 가장 깊은 고민은 데이터 및 문서 취합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과 실제 조직의 ESG에 대한 철학과 가치, 운영 방식의 괴리일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보고서 작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량 지표 중심의 간결한 공시체계를 도입하고, 외부 검증을 강화하는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변화만으로는 ESG 경영의 철학과 가치, 조직 문화가 개선되기 어렵다. 지표의 종류나 위치, 검증의 강도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조직 내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행하느냐의 태도 문제이며, 그 중심에는 경영진의 인식과 리더십,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설정된 조직별 실질적인 KPI가 자리해야 한다.
기업의 ESG 경영 수준은 외부 평가 점수로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보다 내밀한 관점에서 ESG가 조직에 얼마나 내재화 됐는지를 확인하려면, ESG 담당자들의 업무 만족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더 정확한 척도가 될 수도 있다. 조직이 ESG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있는지, 가장 가까이서 다루고 있는 기업 내 ESG 담당자들이 자신의 업무에 자긍심을 느끼며 고된 업무도 웃으며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길 바란다.
☞ 이선경 대표는
이선경 그린에토스랩 대표이사는 신한증권과 대신증권에서 채권 크레딧 애널리스트와 주식 애널리스트를 거쳐 CJ경영연구원과 CJENM, CJ제일제당 등에서 전략기획, 재무전략/IR 팀장, 대신경제연구소에서 ESG센터장을 역임했다. 2024년 3월 그린에토스랩을 설립해 ESG공시 및 공급망 컨설팅과 녹색기술/녹색금융 고도화 자문 등을 제공하고 있다. 국민연금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대형금융기관의 ESG모델 및 ESG적용 프로세스 구축, ESG 평가 등을 장기간 수행했고, 정부 기관의 공급망 ESG플랫폼 구축, 환경DB분석 및 산업별 환경성 평가체계 수립 등 금융과 기업에 적용되는 ESG체계 구축 및 전략수립과 경험을 보유한 ESG 전문가이다. 다수의 정부 기관 및 에너지 유관기관에서 ESG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