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RBC, 71조원 규모 지속가능금융 목표 철회…기후금융 후퇴 신호탄
캐나다 최대 은행 로열뱅크오브캐나다(RBC)가 5000억 캐나다달러(약 71조2000억원) 규모의 지속가능금융 목표를 공식 철회했다. 지난 30일(현지시간) 발간한 2024년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통해 캐나다 경쟁법 개정에 따른 공시 제한을 이유로 해당 목표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RBC는 2021년 1000억 캐나다달러(약 101조4800억원)를 지속가능 금융에 투자한 데 이어, 2025년까지 누적 5000억 캐나다달러(약 502조원) 투입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해당 목표는 파리기후협약 이행을 위한 대표적 모범 사례로 평가됐으며, 2023년 말까지 3940억 캐나다달러(약 399조8312억원)가 집행됐다. 그러나 이번 발표로 나머지 1060억 캐나다달러 (약 107조5688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은 무산됐다.
이는 캐나다 대형 금융기관이 기후금융 공약을 공식 철회한 최초 사례로, 향후 글로벌 금융권 업계 전반에 파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RBC는 보고서에서 "지속가능금융 활동 측정 방법론을 검토한 결과, 자사의 지속가능금융 실적을 적절히 측정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해당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캐나다 경쟁법에 따라 관련 ESG 지표 공시를 중단하겠다"고 명시했다.
경쟁법 개정 이후 공시 제한…
내부 추적 지속하지만 측정 지표 공시 철회
RBC는 이번 결정을 내린 배경으로 캐나다 경쟁법(Competition Act)의 개정을 지목했다. 2024년에 개정된 이 법은 기업들이 환경 관련 주장을 할 경우, 국제적으로 검증된 기준에 따라 근거를 입증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RBC는 이 신설 조항으로 인해 지속가능금융 실적에 대한 외부 공시가 어려워졌으며, 300억 캐나다달러(약 29조5500억원) 규모의 청정에너지 투자,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투자 3배 확대 등 ESG 핵심 지표의 외부 공시를 전면 중단하거나 일정 기간 연기하기로 했다.
특히, 저탄소 에너지 대비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비율을 나타내는 '에너지 공급 비율' 지표는 산출 방법만 제시되고 세부 수치는 비공개 처리됐다. 시장기관조사 블룸버그NEF는 지난 1월 RBC가 주요 글로벌 은행 중 에너지 공급 비율이 가장 낮다고 평가했다. 해당 수치는 뉴욕시 감사관실(New York City Comptroller)과의 합의에 따라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RBC는 “내부적으로만 관리하겠다”며 방침을 변경했다.
RBC 기후담당 부사장 제니퍼 리빙스톤(Jennifer Livingstone)은 "개정된 경쟁법 조항에 따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 한, 환경 공시나 지표를 외부에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며, "내부 추적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후금융 단체 스탠드어스(Stand.earth)의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금융국장은 "이번 철회는 사실상 기존 측정방식이 부정확했음을 인정한 것"라며, "연방정부는 자발적 공약이 아닌 강제 공시 체계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넷제로 은행 연합 탈퇴 및 기후금융 전략 변화
로이터는 "이번 발표가 단순한 보고서 상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ESG 전략을 둘러싼 금융권의 구조적 후퇴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RBC는 유엔 후원 하에 마크 카니(Mark Carney) 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가 설립한 '넷제로 은행 연합(Net-Zero Banking Alliance)'에서도 2024년 초 공식 탈퇴했다. 이 연합은 금융기관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과 기후 리스크 관리를 지원하는 글로벌 이니셔티브다.
RBC 탈퇴이후, TD은행, 몬트리올은행(BMO), 캐나다국립은행(National Bank of Canada), 캐나다제국상업은행(CIBC) 등 다른 대형 캐나다 은행들도 기후 관련 공시와 목표가 기업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잇따른 탈퇴를 선언했다. 캐나다 증권 규제기관이 경제적 부담과 경쟁력 저하를 우려해 기후 관련 의무 공시 도입을 유예한 것도 주요 맥락으로 작용됐다.
스탠드어스 브룩스 국장은 "NZBA 탈퇴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로 은행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며 “다른 대형 은행들이 RBC의 행보를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RBC처럼 시장 리더 금융기관조차 후퇴하고 있다는 점은 금융권 전반의 구조적 후퇴 가능성을 시사한다”며 "향후 캐나다 정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지속가능 금융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캐나다 경쟁법 전문가 줄리앙 보알리외(Julien Beaulieu)도 "지속가능금융 기업들이 경쟁법 개정을 명분으로 ESG 공시를 줄이는 경향이 확산될 위험이 있다"며, "이러한 흐름은 금융기관의 ‘정보 은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RBC는 보고서 말미에 "2022년 설정한 중간 목표도 지정학적 변화, 에너지 시장 전망, 기술 성능 지연 등으로 달성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