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개발도상국 원전 프로젝트 자금 지원 재개
세계은행(World Bank)이 64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 자금 지원을 공식 재개했다. 1959년 이탈리아 원전 이후 중단됐던 원전 투자를 재개하면서, 개발도상국의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전략 전환에 나선 것이다.
세계은행 이사회는 2013년부터 시행된 ‘원전 프로젝트 자금지원 금지 조항’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세계은행 아제이 방가(Ajay Banga) 총재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전력 수요 대응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시급하고 복잡한 개발 과제 중 하나”라며, “원전에 대한 지원 재개에는 비교적 쉽게 합의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반면, “천연가스 생산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세계은행의 이번 결정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 확대를 요구해온 흐름과 맞닿아 있다. 미국은 세계은행 최대 주주로, 15.8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SMR 수출을 포함한 자국 원전 산업 육성에 주력해왔다.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4월 연설에서 “원전 투자는 신흥국 에너지 공급을 혁신할 수 있다”며 세계은행의 원전 투자 금지 정책 해제를 요청한 바 있다.
국제사회의 탄소중립 기조도 이번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2022년 미국, 프랑스, 가나 등 20여 개국은 유엔 기후총회(COP)에서 2050년까지 전 세계 원전 용량을 세 배로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현재 28개국이 상업용 원전을 운영 중이며, 10개국이 2030년까지 신규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고, 2023년 자국 내 마지막 원전도 폐쇄했다. 그러나 최근 기민당(CDU) 중심의 새 독일 정부는 가스 공급 안정성을 위해 "원자력을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대우하는 EU 법안에 더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선회했으며,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세계은행 내부에서도 “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로 개발도상국의 원전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의 원전 수출 경쟁력에 대응해 자국 내 원전 확대와 함께 SMR 수출 기반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연료 공급부터 건설, 금융까지 ‘원스톱’ 패키지 모델로 개도국 원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세계은행이 시장에 진입할 경우, 시장 다양성을 높이고 개도국들이 독자적으로 원전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평가다.
세계은행, 전력 수요 대응 위해 “국가별 에너지 믹스 자율성 보장”
세계은행은 2013년부터 원전 프로젝트에 대한 직접 지원을 공식 중단했으며, 2019년부터는 석유·가스 개발(업스트림)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신규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다만 최빈국에 한해 천연가스 프로젝트는 예외적으로 고려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방가 총재는 “개발도상국의 전력 수요는 2035년까지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연간 에너지 인프라 투자 규모가 현재 2800억달러(약 398조원)에서 2035년 6300억달러(약 894조6000억원)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가별 상황에 따라 태양광, 풍력, 수력, 지열 등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천연가스, 원자력 발전 등 다양하게 조합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는 각국이 최적의 에너지 믹스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탄소포집(CCUS), 해양에너지 등 신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승인 절차 간소화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향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협력해 비확산, 안전성, 규제체계 등과 관련된 자문 역량도 강화할 계획이다.
이번 정책 결정에 대해 원전 지지 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에너지 싱크탱크 에너지포그로스허브(Energy for Growth Hub)의 토드 모스(Todd Moss) 대표는 “이번 결정은 동남아시아의 탈석탄 전략에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은 석탄 의존도가 높지만, 세계은행 자금으로 원전을 대체 전원으로 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덧붙였다.
세계은행의 이번 결정은 이들 국가에 실질적인 재정 지원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원전 위험에 대한 경고를 오랫동안 제기해온 과학자 연합(Union of Concerned Scientists)도 “기존 원자력 발전소가 제공하는 저탄소 전력은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점점 더 가치 있는 자원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기후 활동가들과 일부 전문가들은 “원전과 천연가스에 자금이 쏠리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확대와 기후 적응 투자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방가 총재는 이번 조치와 함께 향후 석유·가스 시추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 재검토 가능성도 언급했다. 세계은행은 2017년부터 석유·가스 시추에 대한 신규 지원을 중단했으며, 이번 회의에서는 독일·프랑스·영국 등의 반대로 구체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밝혔다. 중하류 가스 인프라에 대해서는 일부 조건 하에 자금 지원을 검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