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읽기】2021, 해외 주주총회엔 있고 국내선 없었던 핵심 질문
12월 결산 상장법인 주주총회 시즌이 마무리됐다. 포스코·SK·한화 등 굵직한 기업 총수에서 ESG란 단어가 화두에 올랐던 탓일까. 이번 주총에서도 관전 포인트는 ESG 위원회 발족·여성 사외이사 선임 등 관련 이슈였다.
주주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주총회 주주총회소집공고를 공시한 상장사 중 주주제안 안건은 127건에 달했다. 코스피 47건(16곳), 코스닥 80건(15곳)으로 역대 최다 수준이다.
2016년 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주주제안은 증가하고, 다양해졌다. 2019년 주주제안은 114건(코스피 52건·코스닥 62건), 2020년 123건(코스피 48건·코스닥 75건)으로 증가했다. 여성 이사 선임의 건을 포함한 이사 선임의 건이 55건, 이사회 특정 성별 과다 구성 금지, 이사회 내 ESG 위원회 설치 등으로 정관 변경도 21건이나 제안됐다. 공정경제 3법 도입의 영향으로 감사위원 독립성 문제도 24건이나 접수됐다.
기업 주주총회에서 ESG와 관련된 안건이 제기된 건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기업의 구체적인 ESG 전략을 묻고, 견제하는 적극적인 주주제안은 드물었다. 더불어 가결된 안건은 단 8건이었다.
기업 감시를 위한 주주제안,
해외선 기업 둘러싼 ESG 논란 질의 이어져
주주제안을 통해 주주들은 기업들의 이슈와 관련된 경영의사결정에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효율적인 모니터링을 위해 유용한 수단이 되고, 주주제안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경영진에게 보내는 신호 효과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해외선 활발한 주주제안을 할 뿐 아니라 그 주제도 다양하다. ISS에 따르면, 몇 주 뒤로 예정된 연례주주총회를 앞두고 미국 기업에 제출된 주주제안 수는 484건. 작년 446건에 비해 증가했다.
작년 9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주주제안을 할 수 있는 요건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특히 올해 주주총회를 앞두고 기업을 둘러싼 ESG 현안에 대한 질의 내용이 많았다. 코로나 백신 개발사인 화이자와 존슨앤존슨은 코로나19 백신 및 치료제 가격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했는지 밝혀달라는 주주제안을 받았다. 지난 12월 제출된 해당 제안은 "화이자와 존슨앤존슨이 미 연방정부로부터 공적인 자금을 지원받아 백신을 만들었으나 가격 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며 정보공개를 요청한 것이다.
이를 제안한 트리니티 헬스는 “높은 백신 가격은 화이자의 명성을 해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규제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존슨앤존슨은 코로나19 판데믹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은 비영리 가격을 유지하겠다고 했고, 화이자는 답변을 거부했다.
기업 내 노동자 처우에 관심을 가지는 주주들도 나타났다. 최근 뉴욕시 연금펀드는 아마존에 "노동자들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다 투명하게 밝히라"는 내용의 제안을 보냈다. 이에 아마존은 작년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00억달러(약 11조원)를 넘게 지출했다고 밝혔다.
육류 생산업체인 타이슨푸드는 지난해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3개의 도축장을 폐쇄하고 수백 마리의 닭, 돼지, 소를 안락사시켰다. 주주들은 “기업의 코로나19 대응이 적절치 않았고, 대응 과정도 불투명했다”며 노동자들의 안전과 인권에 대한 더 많은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뱅가드와 블랙록은 이 제안에 찬성했다. 제안이 통과되진 못했지만, “코로나19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억 달러를 투자한 바 있다”며 타이슨 푸드의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지급된 임원 보너스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뤄졌다. 카지노 운영사인 윈 리조트, 요식업 체인 다든 레스토랑, 석유·가스 회사 슐럼버거 등은 작년 실적과 주가가 폭락했음에도 임원 급여가 하락하지 않도록 임금체계를 다시 작성한 바 있다.
윈 리조트는 최고 경영진의 보상 체계를 수익 창출이 아닌 현금 절약을 보상하는 방향으로 바꿨고, 다든 레스토랑은 매출 하락이 임원들의 연간 상여금에 반영되지 않도록 비재무 성과만 고려하기로 했다. 작년 주가 60% 하락을 맛본 슐럼버거는 전체 인력 중 5분의 1을 감축했음에도 불구하고 EBITA(법인세, 이자,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 지표로 임원 성과급을 계산했다.
기후계획 안건 자발적으로 올린 기업도
기업의 기후계획 공개를 요구하고, 이에 대해 투표를 진행한 곳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지난해 유니레버는 글로벌 대기업으로는 처음 주주총회를 앞두고 자사의 기후 전략을 먼저 안건으로 제안한 바 있다. 온실가스 감축계획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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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세이 온 클라이밋(Say on Climate)’ 캠페인도 활발하다. ▲연간 배출량 공개 ▲배출량을 관리하기 위한 계획 제시 ▲주주총회 안건 상정 및 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캠페인은 투자자들 뿐 아니라 광산기업 리오 틴토, 무역회사 글렌코어, 유니레버 등 15개 영국 대기업도 참여했다.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S&P, 의결권 자문사 ISS와 글래스 루이스도 이에 동의했다.
이런 움직임에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주주총회 안건으로 올리겠다고 나섰다. 호주 석유 및 가스 회사인 산토스와 우드사이드는 2022년 주주들에게 기후 투표권을 주기로, 스위스 식품기업 네슬레와 건축자재 회사 라파르헤홀킴은 올해 기후 계획을 안건으로 올리겠다고 나섰다.
미국 알파벳(구글의 모회사)과 식음료 회사 몬스터 음료, 철도회사 유니온 퍼시픽 등에겐 이미 기후 투표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사회 주주제안, 찬성률도 높아지네
안건이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주주제안에 대한 찬성률도 높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업체 글래스루이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기업 주주제안에 대한 찬성률은 각각 31%, 28%로 각 기업의 정책을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주주제안에 대한 찬성 비율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글래스루이스는 “기후 변화 대응, 고용 관행 등에 투자자가 참여하고 있다”며 “제안도 기후대응을 넘어 석탄, 삼림벌채, 임금 격차, 인권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러셀 3000 기업을 대상으로 ‘2017-2020 의결권 행사 동향’에 따르면, 작년 기후 관련 이슈에 대한 주주제안은 75건, 이 중 24건이 표결에 부쳐졌다. 회사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 보고하도록 하거나 기후변화에 관련된 비즈니스 리스크를 평가하도록 하는 안건들이다. 평균 찬성률은 2019년 24.1%에서 31.6%로 높아졌다. 표결에 부쳐진 안건 24개 중 4건은 통과됐다. 주주제안 안건 통과율 한 자릿대에 불과한 국내에 비해 3배 정도 높은 수치다.
주주제안 이슈를 다양성으로 넓혀보면 찬성률은 더욱 높아졌다. 관련 안건은 63건, 이 중 7건이 통과됐다. 이사회 및 직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친 절차와 방법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 근로계약서상 중재 조항 및 관련 분쟁 현황을 보고할 것, 이사회 및 직원 구성의 다양성, 성별 임금 격차의 공시 등이었다. 이사회 다양성에 관한 평균 찬성률은 2018년 18.3%에서 2020년 36.8%로 올랐고 직원의 다양성에 관한 찬성률도 2017년 28.6%에서 2020년 38.2%로 상승했다.
입 꾹 닫고 있는 국내 기관투자자
좋은 기업 돼야 주주 가치도 증진된다
반면 국내 정서는 사뭇 다르다. 이사회 다양성 고려, 감사위원 독립성 등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긴 했지만 국민연금 등 대형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들은 소극적인 행보만을 보이고 있다. 활발하게 기업을 감시해야 할 주주들이 거수기 역할에 그치면서 “기업 감시는 시민단체가 다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포스코의 기후·인권·노동 문제를 지적한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이지우 간사는 “덩치 큰 기관투자자나 연기금 같은 경우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됐음에도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고 있다”며 대형 연기금들이 움직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권오인 국장은 “주주들이 기업을 잘 감시해야 기업도 좋은 기업으로 성장해 주주가치도 증진 시킬 수 있다”며 “기관투자자나 연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가입은 이뤄졌지만, 아직 현실엔 당도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지적했다.
포스코의 경우 주주총회 전 산업재해, 부당해고, 국내 기업 중 가장 많은 탄소 배출량 등 기업을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최근엔 미얀마 군부와의 커넥션으로 인한 네덜란드 공적연기금으로부터 서한을 받기도 하는 등 투자자라면 민감했을 주요 이슈가 많았지만, 이에 대한 주주제안은 한 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