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가정용 에어컨 10년 새 2배…노후 전력망 한계 직면
유럽이 또다시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리면서, 에어컨이 빠르게 일상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13일(현지시각) 블룸버그는 유럽의 전력 인프라가 에어컨 설치를 감당할 준비가 충분치 않다고 전했다. 각국 정부는 폭염 속 냉방 수요를 감당하면서도 온실가스 배출과 정전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다.
유럽 가정용 에어컨 구매량, 10년 새 두 배로
과거 이탈리아·스페인 남부에 한정됐던 냉방 설비는 네덜란드, 영국 등 북유럽으로 확산 중이다. 에어컨 제조기업 다이킨(Daikin)에 따르면,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구매량은 2010년 이후 두 배로 늘었다. 전자제품 유통사 갈락수스(Galaxus)는 독일·오스트리아에서 판매 기록을 경신했고, 삼성전자는 유럽 내 설치 교육 예산을 매년 10%씩 증액 중이다.
히타치(Hitachi)에 따르면 프랑스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2016년 14%에서 2020년 25%로 상승했으며, 2035년에는 5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은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파리의 ‘냉방도일’(Cooling Degree Days, 일평균기온이 기준 온도보다 높은 날들의 일평균기온과 기준 온도와의 차를 누적 합산한 값)은 20년 새 세 배 이상 증가했다.
현재 파리 여름은 1990년대 후반 바르셀로나 기후와 비슷하며, 베를린은 과거 이탈리아 토리노, 브뤼셀은 25년 전 크로아티아의 기온과 유사하다. 스칸디나비아의 에어컨 시장도 이제는 눈에 띄는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전력 피크와 정전 위험, 이미 현실화
온화한 기후를 전제로 설계된 유럽의 전력망은 압박을 받고 있다. 폭염 시 전력 수요가 재생에너지 공급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각국 정부는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최신 국가에너지계획에서 냉방 수요 급증을 전력망 안정성 위험 요인으로 명시했다. 프랑스도 에어컨 사용 통제 부족으로 인한 여름철 전력 피크 가능성을 경고했다. 실제로, 지난 6월 남유럽 폭염 당시 이탈리아 일부 지역은 전력 부족으로 정전이 발생했다.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Fraunhofer Research Institution)의 국제 관계 책임자 이사벨라 나르디니는 “수 시간 안에 전력 수요가 동시 급등하는 현상은 국가 전력망에 큰 압박을 준다”고 지적했다.
소비자 선호도 전력망 부담을 키우고 있다. 많은 구매자들이 가격이 저렴하고 설치가 쉬운 소형·이동식 제품을 선택하지만, 이들 제품은 상대적으로 에너지 효율이 낮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건물 전력소비의 10%가 냉방에서 발생하며, 유럽 비중은 향후 더 늘어날 전망이다. 영국 에너지 컨설팅사 에너지애스펙트(Energy Aspects)의 수석 전력 분석가 사브리나 케른비클러는 “재생에너지의 성과가 저조한 시기에 에어컨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화석 연료 발전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노후 건물·문화적 장벽까지 겹쳐…제조사, 유럽 맞춤 제품 출시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은 겨울 난방에 최적화돼 있어 여름에는 열을 가두는 구조다. 매년 개보수 비율은 1%에 불과해 폭염 대응에 물리적 한계가 따른다. 나르디니는 “밀집된 도시에서는 실외기 설치 공간이 한정돼 열섬현상을 악화시킨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의 에어컨에 대한 반감은 단순히 비용뿐 아니라 미관, 소음, 환경 영향에 대한 문화적 장벽도 있었다. 다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는 냉방 필요성을 공중보건 문제로 인식하는 흐름이 확산 중이다.
제조사들은 이러한 변화를 시장 기회로 보고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다이킨 유럽의 주거용 사업부문 매니저 옐리즈 예너 미나레시는 유럽 시장을 위해 저소음 팬 등 현지 수요를 반영한 제품을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은 환경 규제와 소비자 인식 모두에서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시장이다. 미나레시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이 전 생애 주기에 걸쳐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