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산업정책, 반도체에서 핵심광물로…트럼프, 칩스법 20억달러 전용 검토
트럼프 행정부가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 예산 중 최소 20억달러(약 2조6000억원)를 핵심광물 프로젝트로 전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반도체 지원에 집중돼온 칩스법 자금이 핵심광물로 이동할 경우, 미국 산업정책의 무게중심이 공급망 전쟁으로 확장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는 21일(현지시각)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 같은 움직임을 전했다.
칩스법 20억달러 전용 검토…러트닉 장관 주도 광물 정책 일원화
트럼프 행정부는 의회 추가 심사 없이 집행 가능한 범위에서 칩스법 예산 일부를 핵심광물 분야로 전환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목표는 희토류·리튬 등 핵심광물의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 데 있다.
총 527억달러(약 74조원) 규모의 칩스법은 상무부가 관장한다. 행정부는 기존 반도체 보조금 계약을 재협상하는 한편 일부 재원을 광산·정제·재활용 프로젝트로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관련 자금 집행 권한을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집중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정책 조정은 국방부와의 역할 충돌에서 비롯됐다. 국방부가 최근 희토류 업체 MP머티리얼즈에 지분 투자와 대출·구매 계약을 포함한 35억달러(약 4조8700억원) 규모 패키지를 추진하면서 특정 기업 편중 논란이 불거졌다. 의회에서는 국방부 개입이 과도할 경우 시장 왜곡과 의회 통제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백악관은 전략 조정 필요성을 인식하고, 광물 관련 자금 결정 권한을 상무부 중심으로 재편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행정부의 광물 확보 드라이브는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심해 채굴과 국내 광물 개발 확대를 명령하는 행정조치를 발동했고, 이번 주에는 세계 최대 광산업체 리오틴토와 BHP 최고경영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핵심광물 확보 의지를 재확인했다.
에너지부도 별도의 재원을 투입하며 지원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2021년 제정된 초당적 인프라법 예산을 활용해 핵심광물 프로젝트에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며 광물 투자 확대 흐름에 동참했다.
앨버말·MP머티리얼즈, 정부 지원 기대…정제·재활용 기업에도 기회
트럼프 행정부의 자금 전환 정책은 핵심광물 기업들에 직접적인 수혜로 이어질 전망이다. 앨버말과 MP머티리얼즈는 정부 지원 확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세계 최대 리튬 생산업체 앨버말의 켄트 마스터스 CEO는 지난달 로이터 인터뷰에서 미국 내 리튬 정제소 건설이 “정부 지원이나 파트너십 없이는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투자 전문 플랫폼 AInvest는 칩스법 자금 전용이 현실화될 경우 보조금, 지분 참여, 구매 약정 등을 통해 앨버말의 투자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희토류 광산 운영사 MP머티리얼즈는 이미 국방부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국방부는 MP머티리얼즈 지분 15%를 인수하고 대출·구매 계약을 포함한 35억달러 규모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다만 상당 부분의 자금은 여전히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정제·재활용 분야에도 기회가 열리고 있다. 미국은 채굴한 핵심광물의 10% 미만만 국내에서 가공해 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러트닉 장관이 상무부 합류 전 이끌던 금융사 캔터 피츠제럴드가 주요 주주로 있는 크리티컬 메탈스는 미국 수출입은행 대출 심사 대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AInvest는 전자폐기물과 부산물 회수 분야에도 정책 지원이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 자금이 투입될 경우 핵심광물 공급망의 국내 구축 속도가 크게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정부 지원만으로는 한계…연구진 “폐기물 회수로 공급망 강화 가능”
정부의 직접적 지원 확대에도 불구하고 자원 확보 전략이 예산 전용에만 의존해선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연구진은 기존 광산 폐기물만으로도 핵심광물 수입 의존도를 크게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콜로라도 광업대학 연구팀은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 내 가동 중인 54개 광산의 폐기물과 부산물에 구리, 철, 몰리브덴, 은, 니켈, 아연, 희토류 등 다수의 핵심광물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부산물의 1% 미만만 회수해도 다수 원소의 수입 의존을 줄일 수 있으며, 리튬은 1~10% 회수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미국 광산 폐기물에서 나오는 연간 리튬만으로 전기차 1000만대 생산이 가능하다고 추정했다.
70개 핵심 원소를 분석한 결과 망간은 9900만대 전기차 배터리 생산에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희토류, 갈륨, 게르마늄 등 15개 원소는 부산물 회수율 1%만으로도 수입 의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평가다.
연구진은 미국의 광물 공급 취약성이 자원 부족이 아니라 회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알래스카 레드독 광산의 게르마늄, 몬태나 스틸워터·이스트볼더 광산의 니켈 부산물 등이 대표적 잠재 자원으로 꼽혔다.
다만 경제성 확보가 최대 과제로 지적됐다. 연구팀은 회수 공정 비용, 환경 규제, 기술 난이도, 정책 인센티브 설계 등이 핵심 변수라고 설명했다. 수익 공유 구조와 폐기물·공정수 재활용 기준 등 세부 설계에 따라 투자 타당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텍사스A&M대학 하미드레자 사무에이 교수는 그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광산업은 매우 전통적인 산업”이라며 “새로운 기술 도입 위험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규제 역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