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실사, 인권에서 기후로 확대…한국형 법제 설계 본격화

2025-08-29     고현창 editor

공급망 실사법과 기후 전환 계획을 둘러싼 국내 입법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28일 국회에서 열린 ‘공급망실사법과 기후전환계획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는 법조계·학계·기업·정부 관계자가 참석해 국제 규제 흐름과 한국형 제도 설계 방향을 놓고 논의를 벌였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실사가 이미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한국이 기후 전환 계획을 법안에 어떻게 반영할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발제에 나선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변호사는 “기업의 공급망 실사는 단순한 비즈니스 논리가 아니라 인권 관점에서 출발한 제도”라며 “결과 책임이 아니라 위험 기반의 사전 예방 의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8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공급망실사법과 기후전환계획 쟁점과 과제’ 토론회 세미나 행사가 열렸다.

 

‘예방적 의무’ 강조한 법제 설계 필요

지현영 변호사는 유럽연합의 공급망 실사법(CSDDD) 논의와 프랑스·독일의 입법 사례를 언급하며 “EU는 단순한 공시 차원을 넘어 기후 전환 계획을 실사 체계에 포함시키고 있다”며 “국내 법안 역시 기후 대응 조항을 보완해야 제도의 취지가 온전히 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정윤 한국법제연구원 센터장은 제도 설계 과정에서의 현실적 한계를 짚었다. 그는 “기후 전환 계획을 공급망 실사에 바로 접목시키면, 사실상 모든 산업과 협력사에 공권력이 작용하는 셈”이라며 “기업 규모와 업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과도한 부담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유정 기후솔루션 변호사도 기업 배출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다배출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은 인권 존중 책임을 넘어 법적 의무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판례와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고 있다”며 “기후 소송 리스크가 현실화되는 만큼, 실사 체계 안에 기후 영향을 명시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현실과 글로벌 기준 사이의 균형 과제

박영아 공익인권법재단 변호사는 “기업의 공급망 실사는 단순히 규제 대응이 아니라 인권·환경 침해를 막기 위한 예방적 관리”라며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례에서 보듯, ‘몰랐다’는 이유로 기업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선미 UNGC한국협회 팀장은 현장에서의 복잡성과 기업 수용성을 강조했다. 그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대기업이 이미 공급망 관리 기준을 요구하면서 국내 기업도 대응하고 있지만, 기준이 너무 다양해 혼란이 크다”며 “법제화가 오히려 일정한 기준을 제시해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국내 발의안의 적용 기준(직원 500명·매출 2000억원)은 국제 논의와 비교해 엄격하다”며 순차적 도입 필요성을 제안했다.

현대자동차 정희섭 상무는 대기업의 선제적 대응과 협력사의 부담을 동시에 언급했다. 그는 “현대차는 협력사 평가와 교육을 통해 ESG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지만, 원자재 채굴 단계까지 관리하려면 사실상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며 “국내 법안이 유럽보다 과도하게 설계되면 공급망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풍강의 이광희 전무는 중소기업의 애로를 직접 전했다. 그는 “전문 인력과 자원이 부족해 대응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다”며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인력·투자 비용 부담을 감안한 정부 차원의 제도적·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종민 산업통상자원부 사무관은 “국내 규제가 해외보다 지나치게 강하면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해외로 이전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CSDDD 개정안(옴니버스 법안) 수준과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기후 전환 계획은 실사와 단순 병합이 아닌, ESG 공시 제도와의 연계성을 고려한 체계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