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억달러 절감 기회 막힌 캘리포니아 VPP 법안…핵심 조항 조용히 삭제

2025-09-08     송준호 editor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연간 최대 137억달러(약 19조원) 전기요금을 절감할 수 있는 가상발전소(VPP) 법안을 추진했지만, 핵심 조항이 삭제되며 확산 동력이 약화됐다.

5일(현지시각) 카나리미디어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VPP 관련 3개 법안 가운데 SB 541을 심사하면서 ‘서스펜스(suspense)’ 절차를 적용해 주요 조항을 삭제했다. 서스펜스는 예산위원회가 재정 영향이 큰 법안을 공개 토론 없이 일괄 수정·보류하는 비공개 심사 방식이다.

이미지=클라럼 어드바이저스(Clarum Advisors)

 

캘리포니아 전기요금 위기에 VPP 주목...연 137억달러 절감 효과

캘리포니아는 하와이를 제외하고 전기요금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다. 주거용 전기요금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47% 상승해 현재 전국 평균의 2배 수준으로 확인된다. 주요 원인은 산불 방지를 위한 송전선로 개선 비용이지만,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산으로 인한 전력망 확장 압력이 추가적인 요금 상승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VPP는 캘리포니아주의 비싼 전기 요금을 완화할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VPP는 옥상 태양광, 가정용 배터리, 스마트 온도조절기, 전기차 충전기 등 분산된 에너지 자원을 연결해 기존 발전소처럼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브래틀 그룹의 분석에 따르면, VPP는 2035년까지 캘리포니아 피크 수요의 약 15%를 줄여 연간 5억5000만달러(약 7640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에너지 싱크탱크 그리드랩과 전력망 AI 솔루션 스타트업인 케발라의 최신 보고서는 2030년까지 절약 효과를 37억달러(약 5조원)에서 137억달러(약 19조원)로 추산했다.

캘리포니아주는 VPP 확산을 위해 2030년까지 7GW(기가와트)의 부하 이동 목표를 설정했다. 부하 이동은 전력 사용량이 몰리는 피크 시간대의 수요를 다른 시간대로 분산시키거나 줄이는 것으로, 발전소와 송전망 추가 건설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기존 방식으로는 해당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가 6월 발표한 현황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년간 VPP 규모가 크게 늘지 않아 현재 3.5GW로 2030년 목표 7GW의 절반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기존 VPP 프로그램들은 정전 위험이 있는 전력 부족 상황에서만 가동되는 수준이어서, 전력회사들이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과도하게 건설하는 것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VPP 및 재생에너지 업계는 이 비용이 고스란히 전기요금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태양광 및 저장 협회의 브래드 히브너 전무이사는 “경제성 관점에서 볼 때 요금이 인상된 대부분의 이유는 배전망에 대한 전력회사의 과잉 지출 때문”이라며 “VPP를 통해 대규모 인프라 확장을 피해야 한다”고 카나리미디어에 말했다. 

 

SB 541 비공개 수정으로 '배전망 데이터 공개·투자 반영' 조항 빠져

SB 541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발의됐다. 이 법안은 두 가지 주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는 2030년까지 7GW 규모로 설정된 부하 이동 목표의 달성 현황을 추적하고 보고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력회사들이 배전망 데이터를 공개하고 VPP를 활용해 전기 요금에 반영되는 송배전 인프라 투자를 줄이도록 의무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력회사들이 기존 방식대로 발전소와 송전선로 증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분산된 에너지 자원을 활용해 비용을 절감하도록 하는 핵심적인 규제 개혁안으로 제시됐다.

배전망 데이터 공개 조항이 비공개로 삭제되면서, 투자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가 보장되지 않게 됐다는 점과 중복 투자를 방지하기 어려워졌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법안을 발의한 조시 베커(Josh Becker) 캘리포니아주 민주당 상원의원은 "누가 왜 그 조항을 삭제했는지 모른다"며 "매우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상원 에너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베커 의원은 “해당 조항을 되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올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마감일인 9월 12일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수정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점쳐진다.

카나리미디어는 전력회사들은 송배전망 투자로 보장된 수익을 얻는 구조여서 이런 지출을 줄일 수 있는 VPP 정책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전력회사들의 로비가 핵심 조항 삭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베커 의원은 법안이 결국 전력회사에도 손해가 아니라고 전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전력회사들도 전기차 충전소나 데이터센터 같은 대형 신규 고객들을 서비스하기 위해 전력망을 충분히 빠르게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우리는 단지 게임 규칙을 바람직한 행동에 보상하도록 조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AB 44·AB 740은 원안대로 진전…VPP 확대는 이어져

나머지 2개 주요 법안인 AB 44와 AB 740은 미세한 수정만 거쳐 원안의 취지대로 통과 절차를 밟고 있다. AB 44는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가 VPP를 활용해 미래 전력 공급 계획을 수립할 때 필요한 발전 용량을 줄이는 방법론을 개발하도록 의무화한다. 

AB 740은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가 2026년 11월까지 VPP 배치 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한다. 이 계획에는 VPP가 2030년 7GW 부하 이동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자원, 정책, 일정이 포함되며, VPP 확산을 위한 장벽과 기회도 식별해야 한다.

SB 541의 핵심 조항은 빠졌지만, 나머지 두 법안만으로도 VPP 확산에는 일정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청정에너지 업계단체 어드밴스드 에너지 유나이티드의 에드슨 페레즈 캘리포니아 담당자는 “AB 44는 임시방편적으로 운영돼 온 과정을 더 투명하게 만들 것”이라며 “AB 740은 구체적 이행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기관 간 협력을 의무화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클라럼 어드바이저스에 따르면, 북미 VPP 시장은 2025년 현재 30GW 이상이 등록됐으며 2030년까지 연평균 25%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