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기후금융 대신 에너지 안보·AI 성장 논리로 선회
월가 은행들이 기후금융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에너지 안보’와 ‘AI 성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블룸버그는 25일(현지시각) 금융기관들이 인공지능 산업 확대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고 전했다.
사모펀드 블랙스톤 출신 제임스 소카스는 “그린 프리미엄은 사라졌다”며 “경제성이 담보된 프로젝트만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 투자라는 이름 대신 에너지 안보나 AI 전력 공급으로 설명해야 승인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공정금융’ 행정명령…결국은 화석연료 자금 보호
세계 주요 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이 2021년 넷제로 연합에 가입했을 당시 목표는 포트폴리오를 1.5도 제한 시나리오에 맞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은행들은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거래에 뛰어들고 있다. 화석연료 금융 제한에 관한 언급은 사라졌고,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원자력·지열 등 저탄소 에너지도 자금조달 대상으로 떠올랐다.
트럼프 집권 하에서는 ‘기후금융’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적 리스크로 비쳐지고 있다. 트럼프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재생에너지를 “농담”이라 부르며, 풍력 터빈을 “한심하다”고 조롱했다. 기후변화 개념 자체를 “세계 최대의 사기”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이거나 불법적인 금융거래 배제(debanking)’을 막기 위해 지난달 서명한 ‘모든 미국인을 위한 공정금융 보장’ 행정명령도 금융권의 부담으로 떠올랐다. 기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석유·가스 기업에 대한 자금 차단을 금지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로펌 DLA 파이퍼는 지난달 성명에서 “금융기관들이 집행 조치나 민사 책임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로펌 루스 고먼은 “석유·가스·에너지 기업이 다른 산업과 동일한 금융 접근권을 보장받는지가 핵심 점검 영역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덕에서 재무로…기후 리스크·재생에너지 고려 확대
그러나 컬럼비아대 지속가능투자센터의 리사 삭스 소장은 “금융산업은 언제나 경제적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며 “정치가 금융 리스크 평가 자체를 바꾸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AI 산업의 전력 수요 급증은 금융 전략을 재편하는 동력이다. 블룸버그NEF는 미국 내 데이터센터 용량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으며, AI 학습과 서비스의 전력 수요가 10년 내 4배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로 준공된 대규모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의 91%가 가장 저렴한 신규 화석연료 발전보다 낮은 비용으로 전력을 공급했다. 블룸버그NEF는 전기화와 재생에너지 확대가 2050년까지 연료비를 19조달러(약 2경6771조원) 절감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은행과 투자자들은 에너지 공급 확대에 집중하는 동시에, 기후변화의 물리적 충격으로부터 자산을 지키는 문제도 고려하고 있다. 부동산·인프라 등은 극단적 기상이변에 따른 가치 조정 리스크가 크며, 인프라 거래에서 사모펀드들이 점점 더 중시하는 실사 항목이 되고 있다.
비영리단체 세레스의 민디 루버 대표는 “온실가스 배출의 도덕적 측면보다 재무적 측면에 초점이 옮겨가면서, 결국 기후변화가 가져올 잠재적 손실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은행들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문제는 단순히 규제 준수나 평판 관리가 아니라, 이익과 회복력의 문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