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Ti, 기업 넷제로 기준 개편…산업별 감축경로로 시나리오 해석 부담 줄였다
과학기반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가 기업의 탄소중립 목표 검증 체계를 전면 개편하는 초안을 내놨다. 새 '기업 넷제로 표준 V2'는 기업이 업종과 규모에 맞춰 감축 경로를 자율 설계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대폭 확대했다.
10일(현지시각) ESG 투데이 등 외신은 SBTi의 이번 개정이 과학기반 기후 행동을 더 실질적이고 실행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보도했다.
SBTi는 2015년 설립 이후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글로벌 표준 역할을 해왔다. 현재까지 전 세계 1만2000개 기업이 SBTi 감축목표를 설정했거나 검증 절차를 밟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2021년 제정된 기존 기준을 4년 만에 전면 개정한 것으로, 공개 의견수렴은 12월 8일까지 진행된다.
감축 경로 3가지로 세분화…EAC 사용 기준 명확히
초안의 핵심은 감축 경로 선택 폭을 넓히면서도 과학적 일관성을 유지한 데 있다. 직접배출(Scope 1)은 ▲선형 감축 경로 ▲저탄소 활동 비중 확대 ▲자산 탈탄소화 계획 등 세 가지 접근법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사업구조나 기술 수준이 다른 기업들이 현실적으로 감축목표를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간접배출(Scope 2)은 모든 기업에 단기 감축목표 설정을 의무화하되, 중소기업은 장기 목표를 선택 사항으로 둬 부담을 줄였다. 재생전력 구매나 계약전력 전환에 쓰이는 환경속성인증서(EAC)의 활용 기준도 새로 정비했다.
EAC는 반드시 전력 사용 지역과 동일한 권역에서 조달해야 한다. 해외에서 값싼 인증서를 사서 감축 실적을 부풀리는 행태를 막기 위한 조치다. SBTi는 이를 통해 지역 전력망 내에서 실제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는 효과를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EAC는 공급망(Scope 3) 감축에는 직접 참여나 물리적 추적이 어려운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가치사슬 배출(Scope 3)은 기업의 영향력이 크지만 감축이 가장 어려운 영역으로 꼽힌다. 이번 개정안은 이 특성을 반영해 ▲배출집약도(Intensity) ▲활동연계(Activity Alignment) ▲거래상대방 연계(Counterparty Alignment) 등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SBTi는 이번 기준이 가치사슬의 다양성을 반영해, 기업이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감축을 추진하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업종별 세부 모듈 신설…전력·운송·농축산 기준 구체화
이번 초안에는 산업별 감축 경로 모듈이 처음으로 포함됐다. 전력·운송·농축산 등 주요 산업의 배출 구조와 감축 요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반영해, 각 업종별로 표준화된 감축 경로를 제시했다.
전력부문은 발전원별 배출계수와 재생에너지 비중을 핵심 변수로 삼았다. 석탄·가스·태양광·풍력 등 발전원 비중에 따라 배출 강도가 달라지는 구조를 반영해, 화석연료 전력 사용이 줄어들수록 전체 배출량이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연도별로 계산할 수 있도록 했다.
운송부문은 연료 전환과 차량 효율을 독립 지표로 구분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수소차로의 전환 속도와 남은 차량의 에너지 효율 개선도를 별도로 계산해, 두 변화를 합산하면 기업이나 산업의 배출감축 경로를 자동으로 도출할 수 있게 했다.
농축산업은 메탄(CH₄)과 토지이용 변화를 개별 지표로 설정해, 사료 개선·토양관리·축산 공정 등 감축 수단별 효과를 각각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기업이 IEA, IPCC, NGFS 등의 시나리오를 참고해 자체 감축곡선을 만들어야 했지만, 이번 개정안에서는 SBTi가 그 과정을 대신 수행해 산업별 표준 경로를 제공한다. 기업은 이 경로를 적용해 목표를 세우면, 과학기반 기준에 맞는 감축목표로 검증받을 수 있다.
SBTi는 이러한 구조가 기업이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실질 감축을 우선시하도록 설계됐다고 밝혔다. 복잡한 시나리오 모델링 없이도 산업별 표준값에 따라 넷제로 목표를 세울 수 있도록 한 것이 이번 개정의 핵심이다.
전환계획 공개 의무화…조기 감축기업엔 '리더십' 등급 부여
신뢰성 확보 장치도 강화됐다. 대기업(또는 고소득국가의 중견기업)은 목표 검증 후 12개월 이내에 전환계획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2035년 이후에는 아직 감축되지 않은 잔여 배출을 탄소 제거 포트폴리오를 통해 점진적으로 상쇄해야 한다.
또한 조기 감축에 나선 기업을 인정하기 위한 ‘리더십(Leadership)’ 제도를 신설했다. 전체 배출(Scope 1~3)을 100% 관리하는 대기업이나, 직접·간접배출(Scope 1·2)을 모두 감축한 중소기업이 대상이다. SBTi는 이 제도가 단순히 목표를 세운 기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감축행동을 조기에 실행한 기업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케네디 SBTi 최고경영자는 "기업이 과학기반 행동을 통해 전환 리스크를 줄이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이번 협의는 기업과 투자자가 향후 기후행동의 방향을 함께 정립할 기회"라고 말했다.
SBTi는 이번 초안에 대한 공개 의견수렴을 12월 8일까지 진행하며, 2026년부터 새 표준을 공식 적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