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SFDR 전면 개편…PAI 보고 의무 ‘대형 금융사만’ 남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투자업계를 대상으로 한 ESG 규제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하는 개편안을 공개했다.
20일(현지시각) 집행위가 발표한 개정안에 따르면, 지속가능금융 공시규제(SFDR)은 앞으로 자산운용사에 전체 포트폴리오의 부정적 환경·사회 영향을 보고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개편된 ESG 펀드 분류체계에 ‘전환(transition)’을 포함한 새로운 카테고리를 도입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부정적 활동을 제외하는 ‘배제 기준(exclusion thresholds)’을 적용하도록 했다.
집행위는 현재 규정은 공시 내용이 지나치게 길고 복잡해 투자자들이 상품을 이해하고 비교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편된 규칙은 일반 투자자 친화적이며 기업의 활용도도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DNSH 요건 전면 삭제 및 펀드 분류체계 정비
블룸버그는 이번 개편안이 이달 초 유출된 초안과 대체로 유사하며, 업계에서 기존 체계를 두고 수년간 제기해 온 불만을 반영했다고 전했다. 펀드 공시 분류가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는 비판과 방대한 데이터 수집을 운용사에 요구하는 방식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EU 집행위는 이번 개편안에서 기존의 ‘중대한 피해를 야기하지 않을 것(Do No Significant Harm, DNSH)’ 요건을 전면 삭제하고, 이를 특정 활동을 제외하는 배제조항으로 대체했다.
아울러 ESG 펀드 분류체계도 새롭게 재정비했다. 먼저 제7조는 ‘전환(transition)’ 카테고리로 규정돼, 펀드 구성의 최소 70%를 환경·사회 전환 목표에 투입하도록 했다. 제8조는 ESG 요소를 포트폴리오에 통합하는 ‘통합(integration)’ 카테고리로 재정의됐으며, 이 경우 전체 자산의 70% 이상이 ESG 통합에 사용돼야 한다. 가장 상위 등급인 제9조는 지속가능성을 명시적 목표로 두는 펀드로 구분해, 펀드 자산의 최소 70%가 측정 가능한 지속가능성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기준을 새로 제시했다.
집행위는 화석연료 기업은 새로 구성된 ESG 펀드 분류체계 중 가장 상위 두 개 등급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세계자연기금(WWF)은 이를 긍정적 조치라고 평가했지만, 규제체계의 기후 신뢰도를 위해 석유·가스 기업을 전면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사회 영향 보고 의무는 CSRD 적용 대상인 대형 금융기관에만 남아
의원 및 회원국 승인 절차가 남아 있지만, 법률회사 시몬스앤드시몬스는 이번 변경안이 EU 금융산업에 지진과도 같은 충격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집행위의 SFDR 개편 권고안은 자산운용사뿐 아니라 은행, 보험사, 연기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에 따라 환경·사회 영향에 대한 보고 의무는 별도의 ESG 규제인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적용 대상인 대형 금융기관에만 남게 된다.
비영리단체들은 공시 의무 축소가 투자자 보호를 약화한다며 비판했다. 특히 자산운용사에 전체 포트폴리오의 부정적 영향을 보고하도록 한 기존 규정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셰어액션(ShareAction)의 이사벨라 리터 정책담당은 “기관 차원의 주요 부정적 영향(principal-adverse impact, PAI) 공시를 폐지하면 투자자와 소비자는 투자 대상이 실제로 환경·사회 목표에 기여하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EU는 ESG 규제체계를 단순화해 기업 부담을 줄이는 방향을 견지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주 CSRD와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의 의무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핵심 의원들은 유럽 기업의 경쟁력 회복 필요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따라 기존에 지침 적용 대상이던 기업의 90% 이상이 규제 범위에서 제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