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기업 반발한 EU 공급망 실사법,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공급망 인권 및 환경 실사(due diligence) 입법을 앞두고, 상당수 회원국과 업계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월 법안은 약칭 EU ESG 법안(Sustainable Corporate Governance)으로, 이사진 보수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반영하는 방안과 공급망 실사 의무화가 담겼다. 다만 공급망 실사 의무화에 국내의 중대재해처벌법과 유사한 법안도 포함돼 유럽 기업들이 이에 반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EU 위원회는 올해 2월 EU 역내에 설립된 모든 기업의 공급망 인권 및 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상정했다. 인권, 환경, 좋은 거버넌스 3개 분야를 중심으로 기업이 더욱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EU 위원회의 샐러 사스타모이넨 장관은 “현재 규제는 공급망에서 벌어지는 환경 및 인권 침해를 예방하는데 실패했다”며 “기업들은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면서도 단기적인 재무 가치 극대화에만 몰두해왔다”고 지적했다.
법안에는 아동노동, 산업재해 예방 등을 위해 기업이 협력업체 및 하도급업체 등 공급망 가치사슬에서 인권, 환경, 지배구조를 감시하고 실사(due diligence)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업은 ESG와 관련한 부정적 영향을 명시하고, 가치사슬 지도와 자체 전략을 포함한 ‘실사 전략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EU 회원국은 문제가 있는 기업을 조사할 수 있으며, 조사 결과에 따라 대규모 행정 과태료와 수입 금지 처분 등을 내릴 수도 있다.
공급망 실사 의무 관련 소송에서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책임도 기업이 증명토록 했다. 역내·외 기업 상관없이 직원이 250명 이상이고, 연간 매출액이 5000만유로 이상인 대기업과 금융업, 상장된 중견기업이 대상이다.
기업 대부분을 대상으로 ESG 실사를 의무화한다는 내용에 기업들은 반발했지만, EU 위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대한 환경 및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 CEO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방안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EU 기업들은 섬유 공장의 아동노동 행위, 위험한 노동환경에 처한 광부, 코발트 채굴이 야기하는 환경 오염과 인권 문제, 야자유 농장 개간으로 인한 삼림 벌채 등을 일으켜 온 바 있다.
위원회는 EU 회원국 중 2017년 공급망 실사법을 도입한 프랑스와 2019년 도입한 네덜란드를 근거 삼아 이를 모든 회원국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아동노동 관련 실사 의무를 위반했을 때 벌금 및 최고경영자에게 최고 2년 이상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다.
이에 기업들은 “과한 처사”라며 우려하고 있다. 독일 자동차 제조사 다임러의 레나타 융고 브렝거 법률 담당 이사는 “제조사가 어떻게 모든 공급업체를 통제할 수 있겠느냐”며 “형사 처벌을 가능하케 한 이번 법안은 오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업이 공급망 문제에서 즉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면, 오히려 기업이 중요한 책임을 회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위원회는 기업이 과한 걱정을 한다고 반박했다. 샐러 장관은 “모든 사건이 법정에 회부되지 않을 것”이라며 형사책임은 사전에 기업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 오히려 법정 비용을 줄인다고 설명했다. 샐러 장관은 “형사책임까지 명시한 건 공급망 법안이 실행부터 결과까지 과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며 “법적 책임을 제외한 법안은 비즈니스에도 나쁘고 피해자들에게도 불공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에 형사책임을 묻는 방안까지 고려되면서 다른 쟁점으로 역외 기업의 제소권도 거론되고 있다. 역외 공급업체가 중대한 인권, 환경 재해를 저질렀을 경우 EU 법원에 제소될 수 있는가가 쟁점이다. 업계는 역외 업체가 EU 법원에 제소된다면 불필요한 소송 남발로 기업 경영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논란이 일면서, EU 최초로 공급망 실사 관련 국내법을 도입한 프랑스는 이에 관한 절충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는 절충안으로 회원국별 공급망 실사 감독당국을 신설해, 법원 제소에 앞서 당국이 중재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공급망 외에도 거버넌스 항목 추가
기업들 "기업의 다양성 고려해 달라"
입법안 마련 초기에는 공급망 실사만 화두에 올랐지만, 4월 말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기업 거버넌스도 도마에 올랐다. EU 위원회는 좋은 거버넌스 부문에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이사회 의사결정에 반영하도록 의무화하고, 기업의 지속가능성 관련 조치를 이사진의 보수에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에 덴마크,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 3개국과 유럽 경영단체 ECODA 등은 공동서한을 발표하고 “법안에서 거버넌스보다 공급망 실사 부문을 집중해서 다뤄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실사 및 기업 거버넌스는 별도로 다뤄져야 할 주제”라며 장기적 지속가능성이 의무화되면 이사회가 전략적 의사결정 시 시민단체와 노조 등의 입장을 반영하게 돼 오히려 주주 등 이해관계자 이익이 침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거버넌스와 관련한 많은 원칙은 이미 기업의 지배구조 코드에 포함돼 있다”며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률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기업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관리될 순 없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법안은 규정(Regulation)이 아닌 지시(Directive)로 채택됐다. 회원국들이 각자 국가법으로 채택해야 구속력 있는 법적 효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강제성은 없지만 EU 위원회는 프랑스와 독일의 사업 관행이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어 전 회원국의 입법을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6월 입법안이 통과되면 2022년 말 효력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