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Insight】제2의 로얄더치쉘? 기후소송 1387건, 기후변화와 인권 연계 흐름
지난주 메이저 석유회사 로얄더치쉘이 네덜란드 법원으로부터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19년 기준 대비 45% 감축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기후소송 판결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자료가 있다.
미국 기후변화 소송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미국 법원에 접수된 기후변화 구제 소송은 6월2일 현재 1387건이며, 미국 외 국가에서는 425건이다. 이 DB는 미 컬럼비아대 로스쿨 산하 사빈기후변화법률센터(Sabin Center for Climate Change Law)와 아놀드앤포터가 공동으로 만들었으며, 기후변화와 관련된 소송 전개를 추적한다. 매월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데, 미국 기후소송 사례만 현재 7561건이 포함돼있으며, 미국 이외 국가의 기후소송 사례도 695건이 포함돼있다. 연방정부나 주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많지만, 일부 사건의 경우 기후변화 영향의 책임이 있는 화석연료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도 늘고 있다. 최근의 판결 내용 및 소송 사례를 보면, 기후소송이 향후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지 짐작할 수 있다.
네덜란드 법원의 판결 근거, "주의 의무 위반"
네덜란드 법원은 무슨 근거로 민간기업에 탄소 배출을 감축하라고 판결했을까. 이번 소송의 원고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네덜란드 지부 등 환경단체 7곳이었지만, 이들은 네덜란드 시민 1만7200명을 대표한 것이었다. 원고측이 제기한 피고(로얄더치쉘)의 범죄 혐의는 “화석연료를 추출함으로써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네덜란드 법원이 문제 삼은 것도 ‘돌봄의 의무 혹은 주의의 의무(Duty of Care)’로서, 기업의 수탁자적 책임이다. 법원은 “기후변화로 인해 인권(human rights)과 생명권(the right to life)을 침해하는 결과가 초래됐고, 이는 기업의 이익보다 앞선다”며 “로얄더치쉘은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로얄더치쉘은 2020년 회사 전체 탄소 배출량의 95%를 차지하는 공급망 및 고객 배출량(일명 스코프(Scope)3에 해당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는 기업이 책임져야 할 온실가스 배출이 회사 공장 문 앞에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로얄더치쉘은 2019년 매출액이 3449억달러(385조원)를 넘는 세게 최대 석유기업 중 하나로, 단일기업으로 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다.
로얄더치쉘은 판결 직후 “전기차 배터리, 수소, 재생에너지, 바이오 연료 등 저탄소 에너지에 이미 수십억 달러를 투자중”이라고 밝히면서 “법원 판결에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항소에는 몇 년이 걸리고, 법원 판결은 즉시 집행해야 한다. 쉘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20% 감축하고, 2035년까지 45%, 2050년에는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하지만 법원 판결로 이 과정을 훨씬 더 당겨야 할 처지에 몰렸다.
이번에 네덜란드 법원이 주목한 ‘주의 의무 위반’은 전 세계 각국의 법 체제에 모두 녹아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이미 프랑스에서 토탈이 비슷한 소송에 직면해 있으며, 이번 판례를 거울 삼아 화석연료를 많이 배출하는 업종(항공, 시멘트, 화학, 광물, 철강 등)에 대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주 호주 연방법원 판결,
"환경부장관의 석탄발전 증설 승인은 주의 의무 위반"
로얄더치쉘 판결에 묻혀 별로 보도가 되진 않았지만, 호주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판결이 지난주에 큰 화제를 낳았다. 호주 연방법원은 “호주 환경부장관은 화이트헤이븐 석탄주식회사(WHC)의 증설을 승인한 것과 관련, 기후변화로 인해 미래의 젊은 층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결정을 피해야 하는 ‘주의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번 소송은 8명의 10대 청소년을 대표해 수녀가 제기한 것이었다. 석탄발전이 많은 호주는 선진국 중 1인당 탄소 배출량이 가장 높은 국가다. 하지만 재판부는 증설 승인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처분 신청은 하지 않았다. 화이트헤이븐 측은 “가처분 신청을 하지 않은 결정을 환영하며, 연방 환경보호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로이터는 미국과 글로벌 기후 소송 사례 일부를 소개해 놓았다. 로드아일랜드, 델라웨어, 코네티컷 등 주정부에는 화석연료 판매로 인해 지구 온난화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정유사들을 고발한 20여건의 소송이 제기돼 있다. BP, 엑손모빌, 쉐브론 등의 기업들은 “이 소송이 기후변화의 도전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날씨와 해수면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해수면벽(sea wall)과 기타 기반시설을 추가로 설치해야 하는 것에 대한 금전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도 있다.
이외에 ▲석유 및 가스회사들이 기후변화의 위협을 고의로 경시함으로써 대중을 오도했다는 소송 ▲엑손모빌과 그 임원들이 기후가 사업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주가하락을 초래한 공시를 했다며 투자자들이 제기한 소송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홍수 위험에 대해 연안 터미널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소송 등 다양하다. 미국 외에서는 주로 환경단체들이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많다.
이미 글로벌 투자자들은 “이번 판결이 ‘기후변화와 인권’에 관련된 기업의 관리 의무 소홀에 초점을 맞춘 맹공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뿐 아니라, 기후만이 아니라 물 부족, 생물다양성 붕괴, 해수면 상승 등도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