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화재가 특이한 이유
쿠팡 물류센터 화재 나흘째... 구조대장 순직
지난 17일 발생한 경기도 이천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 진화 작업이 나흘째 계속되고 있다. 이번 화재는 물품 창고 내 진열대 선반 위쪽에 설치된 콘센트에서 불꽃이 일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발생 당시 쿠팡 덕평물류센터에서 근무하던 직원 248명은 대피했지만, 진화 작업 중 소방대원 1명이 숨졌다. 쿠팡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지만, 쿠팡은 이번 일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됐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는 18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화재와 노동자 안전에 대한 쿠팡의 안일한 태도가 사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며 "이번 화재 사고 조사에 노동조합 참여를 보장하고 노동자 중심의 근본적이고 강력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조는 "화재위험이 높은 전기장치에 대한 문제는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계속 지적해왔던 부분"이라며 "물류센터 특성상 먼지가 심각하게 쌓여있어 누전과 화재 발생 위험이 높았고 평소에도 정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문제가 빈번함에도 쿠팡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거나 시행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물량을 쌓아놓기 위한 메다닌이라고 불리는 화재 대피 공간까지 물품으로 가득 찬 현실 등은 이번 화재 진압이 어려웠던 이유였을 것으로 노동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라며 "많은 노동자가 모여있는 상황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피마저 어렵게 만들어 인명피해를 불러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대부분의 쿠팡 물류센터는 불에 타기 쉬운 물품들로 가득 쌓여있고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화재에 더욱 취약하다"며 "화재 예방 대응 대책은 물류센터 운영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하지만 쿠팡 물류센터 대부분 물류센터 관련 대책은 매우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노조는 사측에 ▲연 최소 2회 이상 물류센터 전 직원 화재 대응 훈련 실시 ▲재난 안전 대비 인원 증원 ▲관리자 대상 재난 안전 교육 ▲전체 쿠팡 물류센터 안전 점검 및 대응 마련 등을 요구했다.
실제로 2018년 물류센터 내부에서 화재가 의심되는 연기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관리자가 근무지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번 화재 현장에선 스프링클러 오작동을 막으려 인위적으로 잠궜을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또 쿠팡이 물류센터 내 현장 근로자들의 휴대폰 소지를 금지하고 있어 최초 화재 발견자가 화재 신고를 하지 못해 소방서 신고가 지연됐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쿠팡 “순직 소방관 유족 평생 지원”, 창업자 김범석 의장은 화재 당일 사임
이번 화재에 대해 쿠팡 강한승 대표이사는 공식입장을 내고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순직 소방관 유족을 평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은 사고 당일 이사회 의장직과 등기이사에서 사임을 발표한 것을 두고 “책임 회피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보상대책 수준으로는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쿠팡에 대한 따가운 눈길은 더욱 거세지고만 있는 모양새다.
쿠팡은 두 차례의 공식 입장문을 내고 “이번 덕평물류센터 화재로 인해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몹시 송구하다”며 “화재 원인 조사는 물론 사고를 수습하는 모든 과정에 최선을 다해 당국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순직한 소방관 가족에게도 ”유가족분들이 평생 걱정 없이 생활하실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순직한 김동식 소방령을 기리고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김동식 소방령 장학기금’을 만드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화재로 소실된 물류센터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생계도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이사는 “1700명의 상시직 직원에게 근무할 수 없는 기간에도 급여를 정상적으로 지급하겠다”라면서 “단기직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희망하는 다른 쿠팡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전환배치의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겠다”고 설명했다. 또 “화재 예방을 위해 쿠팡의 모든 물류센터와 사업장을 대상으로 특별 점검을 진행해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다만 쿠팡은 덕평센터 화재 발생 5시간 뒤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의장직과 등기이사를 사임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지난해 12월 쿠팡 대표이사에서 사퇴한 지 6개월 만이다. 한국 쿠팡의 모든 공식 지위를 내려놓긴 했지만, 쿠팡 지분 약 10%, 의결권 76%를 갖고 있어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 의장이 한국 지위를 내려놓는 이유가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앞두고 법적·사회적 책임을 피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중대재해법은 사업장에서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지키지 않아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김 의장이 한국 쿠팡의 공식 직위가 없으면 책임 소재를 따지기 힘들 수 있다.
쿠팡은 “김 의장은 미국 법인인 쿠팡 아이엔씨(Inc.)의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직에 전념하며 글로벌 확장에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설명했지만, 미국 뉴욕(NYSE) 증시 상장을 통해 조달한 4조원으로 한국 쿠팡을 성장시키겠다고 밝혀온 바 있다. 더욱이 김 의장은 지난 2월 국회 산업재해 청문회 때도 물류센터 담당인 노트먼 조셉 네이튼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를 대신 출석시킨 바 있다. 지난해 쿠팡 물류센터와 외주업체에서 9명의 근로자 사망이 잇따랐지만, 김 의장 명의의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온라인에선 ‘쿠팡 불매’, ‘쿠팡 탈퇴’ 이어져
잇따른 배송기사 과로사로 부정적 평판을 축적해 온 쿠팡에 소비자의 마음이 돌아서고 있다. 이번 창업주의 책임 회피성 사임 결정과 물류창고 화재로 온라인 상에선 쿠팡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화재사고로 노동자 사망은 없었지만, 반복된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부정적인 평판이 누적됐던 게 불매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일반적인 화재 사고에 비해 보상의 범위가 넓고 빠른 의사결정이 이뤄졌어도 쌓여왔던 평판 리스크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마음이 차갑게 식은 것이다.
SNS상에선 #쿠팡탈퇴 #쿠팡불매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쿠팡 회원탈퇴 화면을 갈무리한 ‘인증샷’을 올리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피시(PC)와 모바일 등 플랫폼별 회원 탈퇴 방법을 담은 글도 인터넷에 속속 등장 중이다. 전날에는 트위터에서 ‘쿠팡 탈퇴’가 대한민국 실시간 트렌드 항목에 1위에 올랐고, 네이버 등 검색 포털에선 ‘쿠팡회원’이란 검색어에 ‘탈퇴’가 자동 완성 검색어로 등장했다.
소비자들은 쿠팡이 “문제 대기업과 같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며 비판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창업자가 비양심. 화재 당일 몇 시간 만에 사임 발표하는 거 보고 어이없었음. 문제 책임 안 지려고 꼼수 쓰는 거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 “아마존의 어두운 면인 열악한 노동환경과 플랫폼 입점 업체 가격 후려치기까지 따라가면 어쩌자는 거냐”, “저런 대형 물류회사가 스프링클러도 제대로 작동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나. 징역형뿐 아니라 벌금도 수백억 때려서 안전시설 제대로 안하면 회사 망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