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 위험한 선택, ESG워싱

2021-09-01     박란희 chief editor

얼마전 한 웨비나에서 함께 발제자로 참여한 A기업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뜨끔한 적이 있다. A기업 담당자는 “저희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에서 하는 ESG 평가에서 당당히 최고 등급인 A등급을 받아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SG 평가시스템을 잘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모두 칭송했을 이야기일테지만, 그걸 잘 아는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불안하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의 평가등급은 S, A+, A, B+, B, C, D 등급으로 이뤄진다. 7단계 중 A등급 위에는 A+와 S라는 2단계 등급이 더 있다. 엄밀히 말하면, A등급은 최고 등급이 아니다. 이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A기업에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기업의 지속가능보고서에도 이런 형태의 ‘등급 워싱(Washing)’이 상당히 많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급기야 시민단체 인사들이 모여 ‘ESG 와치독’ 역할을 하기 위한 단체까지 출범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ESG 워싱을 깐깐하게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지금 해외에서는 독일 자산운용사 DWS의 그린 워싱으로 발칵 뒤집힌 상태다. 해고된 전 글로벌 지속가능성 투자 책임자가 “총 운용액의 절반 이상인 4590억 유로를 ‘ESG 통합(integration)’ 자산으로 운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극히 일부만이 통합 전략을 적용했을 뿐”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내부 고발성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독일 연방금융당국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를 받고 있다. ESG 워싱이 실질적인 법적 리스크로 이어지면서, 유럽 자산운용사들이 바짝 얼어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만약 국내 기업과 금융권에도 ESG 워싱 잣대를 강하게 들이대면, 아슬아슬한 기업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속가능보고서에 자사에 불리한 통계수치를 빼 버리는 것도 흔히 보이는 워싱 형태다. 2017년도 자유소비재 부문에서 E사, S사, H사 중 매출액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기업은 E사다. 2위 기업에 비해 세 배나 높은 배출량이었다. 하지만 2018년도에 E사는 톱 순위권에서 빠지고, 전년도 2위였던 S사와 H사가 각각 톱 순위를 차지했다. 알고 보니, E사는 아예 다음 연도에 온실가스 배출량 공개 자체를 하지 않았다. 언론에 ‘매출액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1위’ 같은 내용이 오르내리는 것보다 차라리 통계자료가 없어 비교 수치에서 빠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지속가능보고서에 공개한 수치나 데이터가 모두 자율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런 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속가능보고서 공시 의무화와 공시기준 마련을 통해, 각각의 공시 자료를 비교할 수 있을 때까지는 혼돈은 불가피할 지 모른다. 지금은 마치 ‘서부 개척시대’와 비슷한 상태라 ‘ESG 워싱’을 막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은 없다.

게다가 국내 기업들의 경우는 좀 억울한 측면도 있다. 지난해까지 ESG라고는 모르다가, 갑자기 국내외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ESG 물결에 ‘너도 나도’ 뭔가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벼락치기 공부에 편법이 동원되듯, 일단 ‘ESG A등급’ ‘ESG 채권발행’ ‘지속가능보고서 발간’ 등을 숙제하듯 해내고 있다. 영어 공부할 시간도 주지 않고 토플 최고 점수 받으라고 닦달하는 모양새다. 게다가 요즘은 대선을 앞둔 정치권까지도 ESG를 요술방망이로 아는지, 너도나도 ‘ESG 규제’를 통해 기업 줄 세우기를 하려는 조짐도 많이 보인다.

이쯤에서 잠깐 멈춰보면, ‘왜 ESG인가’라는 다시 근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엄마, ESG 하면 뭐가 좋아요?”

딸아이가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까. 

“응. ESG 하면 그 기업이 돈 잘 벌어.”

지속가능경영이 곧 재무적 성과만은 아니지만, 재무적 성과가 빠진 지속가능경영이 과연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ESG 워싱은 어쩌면 변화를 더디게 하고 돈벌 기회를 지연시키는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박란희 대표 &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