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경제계 요청에 공급망 '인권 실사 지침' 만들기로
일본 정부가 자국 기업의 해외 공급망에서 강제노동 등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는지 기업이 조사하도록 하는 지침인 ‘인권 실사 지침(Due Diligence)’을 만들기로 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 등에 따르면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경제산업상은 “올해 여름을 목표로 기업이 해외 공급망에서 인권침해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지침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관련 법 정비의 가능성까지도 검토할 예정이다.
지침에는 유엔이나 국제노동기구(ILO)의 인권 수준에 근거해 해외 거래처의 인권 실사 조사 방법과 아동노동, 강제노동 등의 문제를 찾아냈을 때 대처 방법이 담길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관련 지침이 마련되면 기업이 해외 거래처나 외국 정부에 인권침해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쉬워질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해 12월 미국 바이든 정부는 위구르족 인권 탄압 문제를 이유로 모든 신장 관련 상품의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법에 서명한 바 있다.
중국 신장 소수민족 인권침해 논란은 이미 일본 기업에도 불똥이 튄 바 있다. 일본의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는 지난해 1월 신장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신장산 면화를 사용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미국 당국에 의해 유니클로 남성용 셔츠 수입통관이 막히는 제재를 당했다.
이후 인권 실사법이 통과된 프랑스에선 시민단체가 유니클로 프랑스 법인을 고발하는 등 자국 기업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지난해 8월 일본 정부는 약 3000개 상장기업에 인권 위험을 파악하는 인권 실사 조사서를 송부하기도 했다. 일본경제신문에 따르면, 주요 기업의 90%가 공급망 인권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관련기사: 유니클로 인권이슈로 발묶인 일본 정부, 3000개 기업 인권 실사 착수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은 “일본 기업에게 피해가 미치는 만큼 이번 지침으로 일본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정부, 기업이 국제 기준에 다른 대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밝히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기업에서는 "구체적인 대처 방법을 모르겠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공평한 경쟁 조건 하에서 기업이 적극적으로 인권을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기업에 실시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할 가능성도 시사했다.
일본 경제단체, '강제노동' ILO 지침 비준 로비도
인권 실사 지침 도입에는 일본 경제인 단체인 게이단롄의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2월 게이단롄은 회원사의 의무지침을 규정한 ‘기업행동헌장’을 개정하며 “회사는 인권실사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기업이 스스로 인권침해를 예방해야 하며, 인권 문제가 불거졌을시 즉시 시정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게이단롄은 “단일 기업이 해외의 인권 실사에 대비하기 어렵다면 업계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정부에 관련 지침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게이단롄은 ESG 투자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강제노동 ILO 지침을 비준해달라고 로비를 해온 바 있다.
기업의 요구에 일본 국회에선 지난해 강제노동 관련 ILO 지침이 비준됐다. 지난 6월 일본 국회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강제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105호)의 체결을 위한 관계 법률의 정비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면서다.
일본의 최대 노총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는 “2011년 국제연합에서 ‘기업활동과 인권에 관한 지도 원칙’을 채택하는 등 인권의 존중과 보호에 관한 인식이 나라 안팎에서 빠르게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에서 중요한 노동기준으로 언급되는 사안을 법안 성립으로 처리한 것은 시의적절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로써 강제노동 지침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브루나이·중국·일본·라오스·마샬제도·미얀마·팔라우·동티모르·통아·투발루 등 11개국만 남게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105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인권정책기본법' 통과됐지만 인권실사 의무조항은 없어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2월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을 명문화하는 내용이 포함된 ‘인권정책기본법’이 법무부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이 통과되기 전 법무부는 기업과 인권에 대한 안내를 담은 ‘2021 기업과 인권 길라잡이’도 발간한 바 있다.
관련기사: 국가 인권정책 총괄 기구 ‘인권정책위’ 출범 이후는?
다만 인권정책기본법과 가이드라인에는 인권 실사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담기진 않았다. 기업과 인권 길라잡이에는 유엔(UN)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OECD 기업책임경영 매뉴얼’ 등의 내용을 토대로, 국제적 기준에 맞는 기업과 인권이 무엇이며, 이를 기업의 규모와 상황에 맞춰 어떻게 잘 실천할 수 있는지 단계별로 소개하는 내용만 담기면서다.
관련기사: 법무부 발간 ‘기업과 인권’ 안내서 훑어보니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에 대해 따로 입장을 내진 않았다. 다만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경우 입법 2달 전 미국과 EU의 공급망 인권관리 동향에 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미국과 EU 등 교역 상대국의 공급망 인권 문제에 대한 법적 제재가 확대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할 수 있도록 공급망 관리 체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