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읽기】 EU 지속가능성 실사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해 유럽연합과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만큼 강력한 법안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전 세계가 이 법안이 어떤 형태의 규제를 내놓게 될지 주목했던 법안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23일(현지시각) 기업의 공급망 인권침해 및 환경훼손 방지를 목적으로 실사를 의무화하는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법률 초안을 공개한 것과 관련, 이 법안을 어떻게 볼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나오고 있다.
1만3000개 EU 기업에 적용, 비 EU기업 4000개도 적용 대상
우선, 이번 법안을 두고 일각에서는 “1% 대기업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기존 예상보다 상당히 후퇴했다”는 의견과, “공급망 실사에 관한 EU 차원의 규제를 제도화시켰다”는 의견이 팽팽한 상황이다.
우선 EU 현지 미디어인 유랙티브는 “이 지침은 약 1만3000개의 EU 기업에 적용되며,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실사대상에서 제외된다”며 법안의 적용범위가 애초보다 훨씬 축소됐음을 밝혔다. 지난해 3월 제시된 결의안에는, ▲EU 회원국 법이 적용되거나 EU 영토에 설립된 대기업 ▲상장된 중소기업 ▲고위험 산업군에 속하는 중소기업을 적용대상에 포함하는 것을 담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나온 초안에는 중소기업이 빠져있었다. 그룹1(직원수 500명이상, 순매출 1억5000만유로 초과 기업) 기업만 적용대상인데, 이는 유럽 내의 상장기업 9400여개, EU 역내에서 활동하는 비EU기업 2600여개로만 적용대상이 좁혀진다는 의미다.
법안시행 후 2년 후부터 적용되는 그룹2(직원수 250명 이상, 순매출 4000만유로)에 속한 기업의 숫자는 유럽 내 상장기업 3400여개, 비EU 기업 1400여개로 집계된다. 종합하면 EU기업 1만3000개, 비 EU기업도 4000개가 적용대상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중소기업 포함 여부는 이번 법안 준비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였다. 유랙티브에 따르면, 지난해 두 차례나 법안이 지연된 이유는 내부의 ‘규제심사위원회(RSB)’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 데 따른 것이었다. RSB가 계속 법안 상정을 지연시키자, EU 의원들과 학자들은 “법안 내부 조사기구의 투명성과 책임성이 결여돼있다”며 비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법안은 당소 2021년 여름에 상정될 예정이다가, 10월, 12월로 계속 연기되었다. 급기야 지난해 연말에는 47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수백 만명을 인권침해로부터 도울 수 있고, 우리의 환경과 기후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법이 세 번째 지연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며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을 압박하기도 했다.
민사상 책임제도, EU 회원국 실사의무 때문에 소송 당하나
또 하나의 이슈는 EU기업이 이번 법안으로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였다. 법안이 상정되기 2주 전인 지난 8일(현지시각), 이케아, 다농, 에릭슨 등 거물급 기업 100여곳은 이번 법안에 대해 우려와 제안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의 핵심은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외국기업이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법안으로 인해 부당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법안이 EU 역내의 모든 기업에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무역협회의 입장과 달리, 이들 기업은 “회사와 거래관계가 가까운 공급망 협력업체들뿐만 아니라 회사의 전체 가치사슬에 법안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협회단체인 ‘비즈니스 유럽’(Business Europe)측은 폰데어라이엔 EC 집행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입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사업장으로서 유럽은 심각하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또 하나의 핵심쟁점은 ‘민사상 책임제도’다. 법안에 따르면, EU회원국은 기업이 실사 의무를 준수하는지 감독해야 하며, 미이행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거나 시정명령 등 법적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기업이 실사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피해가 발생할 경우, 자국의 민사법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즉, EU 기업의 공급망 가치사슬인 개발도상국 내에서 피해가 발생할 경우, EU 회원국의 국내 법원에 보상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기업의 인권, 환경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온 NGO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다.
유랙티브는 이에 대해 “민사상 책임제도의 범위가 제한적이며, EU 기업이 협력업체로부터 해당 기업의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을 준수했다는 ‘계약상의 보증(contractual assurances)’을 확보할 경우, EU 기업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기업 로비 때문에 법안 후퇴" vs. "분수령 될 법안 "
EU 내의 목소리는 찬반으로 나뉜다. 피에르 가타즈(Pierre Gattaz) 비즈니스유럽(BusinessEurope) 회장은 "유럽 기업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치사슬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제안은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EU 기업의 능력을 해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에 밝혔다.
하지만 리처드 가디너(Richard Gardiner) 글로벌 위트니스의 수석 운동가는 “이 법안은 인권과 기후 위기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지난 수십년 동안 대기업들이 지구와 사람들에 미친 악영향을 폭로할 때마다 ‘(협력업체에서 한 일이어서) 우리는 몰랐다’는 반응을 똑같이 보여왔는데, 오늘 법안은 이러한 대응을 불법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환영했다.
물론 수차례 연기된 끝에 발표된 최종안이 당초 계획했던 안보다 훨씬 후퇴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문가들도 있다. 알베르토 알레만노(Alberto Allemanno) 파리 경영대학원 유럽연합법 교수는 NYT에 "이번 결과는 전례 없는 수준의 기업 로비 결과"라고 말했다.
법안은 EU의회 및 27개국 정부의 논의를 거쳐, 최종 수정하는 과정을 진행하게 되면 앞으로 1년 이상 걸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EU차원의 법안이 마련되기 이전에 이미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이 실사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기업들은 준비를 미리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기업실사 의무화법을 제정하고 2017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2019년 제정)와 독일(2021년 제정)은 각각 2022년, 2023년에 시행할 예정이다.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룩셈부르크에서도 국내법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물론 현재로선 적용 기준이 국가별로 다 다르다. 독일은 3000명 이상, 프랑스는 5000명 이상, 네덜란드는 모든 기업을 적용대상으로 한다. 적용 범위도 네덜란드는 아동노동에 한정해 실사를 의무화했다. 위반시 매출의 최대 10%를 벌금으로 내야 하고, 5년 이내 2회 이상 법규위반으로 벌금을 내면 책임자는 2년 이상 징역에 처해진다. 독일은 공급망 실사, 보고를 의무화하고 침해가 발생할 경우 매출의 2% 벌금을 부과하고 공공조달 대상에서 퇴출시킨다.
뉴욕타임즈 등 해외미디어 주목, 국내선 별 반응 없어
흥미로운 점은 이번 법안을 둘러싼 국내외 언론 반응이다. 뉴욕타임스와 로이터, 유랙티브 등 해외 미디어에서는 높은 관심을 보인데 반해, 국내 언론에서는 아직 별 반응이 없다. 국내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가늠을 제대로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나 현대차는 직접 제재 대상이 되고 SK하이닉스와 현대모비스 등은 현지 수요기업으로부터 EU공급망 실사 기준 충족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1%만 적용대상이라는 것에 안도해서는 안된다는 게 주된 목소리다. 이케아, 다농, 에릭슨, BMW 등 적용 대상이 되는 기업은 대부분 공급망 협력업체들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어서, 결국 협력업체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법안은 실사 시행, 모니터링, 정보공시에 이어 1.5도 시나리오에 맞는 전략까지 관여돼있는 등 전방위적인 ‘복합규제’의 형태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럽 진출 국내 기업의 지분관계별 매입 구조를 보면, 관계회사가 66.8%를 차지하고, 지분관계가 없는 기타 회사가 33.2%를 차지한다. 지난해 발표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보고서는 “실사 범위는 지분 또는 계약 등으로 직접 연계된 공급·협력 업체를 포함하므로, 유럽에 진출한 국내 기업은 관계회사 및 직접계약 관계의 기타 회사에 대한 기업실사 의무화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EU 시장으로 수출하는 국내 중소기업은 구매기업에 의해 인권·환경 관리 및 관련 인증 획득 등을 요구받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의 ‘해외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필리핀의 보건·안전 교육 및 관련 정책 미이행 ▲미얀마의 원주민 권리 침해 및 아동노동 ▲우즈베키스탄의 성인 강제노동 및 아동노동 등의 문제가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인권, 환경 침해 위험이 높은 특정 지역 공급망에 대한 모니터링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