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성폭력과 담배 심부름

2022-06-25     박란희 chief editor

상상을 한번 해본다. 40대 후반의 워킹맘, 질풍노도인 고3과 중1의 엄마, 언론사의 편집장이이면서 또 동시에 스타트업 조직의 대표, 골프 안치는 여성이라는 조합은 대한민국의 몇 퍼센트에 속할까. 0.000001% 정도이지 않을까. 

모든 게 너무 부족한 것 투성이다. 일단 물리적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가용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도 부족하다. 부족하니 최극단의 효율을 추구한다. 시간 부족문제는 재택근무와 줌회의를 통해 업무와 가사 및 부모역할을 각각 최적화한다. 스타트업의 인적, 물적 자원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조직문화에 가장 신경을 쓴다. 높은 연봉을 줄 수는 없으니, 완전 재택근무와 수평적이고 개인의 성장을 이끌어주는 조직문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이런 세계만 존재하진 않는다. 스타트업 대표의 명함으로 만나는 수많은 ‘날쌘돌이’들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 20년 언론사 경력 혹은 전직 명함 덕분에 활동하거나 만나는 몇몇 정부유관조직이나 일부 대기업쪽의 분위기는 다르다. 

이들 조직은 돈도 많고 사람도 차고 넘친다. 그래서인지 ‘관료화’ 그 자체다. 정부유관부처와 회의를 하면, 우리 조직의 평소 회의보다 3~4배 시간이 더 걸린다. 미리 나눠준 보고서를 그 자리에서 또 읽느라 세월 보내고,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말하는데 서로 체면치레하고 눈치보느라 뾰족한 소리는 하지도 못한다. 부처에서 온 공무원들이 족히 20명은 넘으니, 그 사람들의 시간을 합하면 얼마나 커다란 낭비일까 싶어서, 최근 회의에서 평소에는 체면상 참았던 비판을 이것저것 말해버렸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용기도 생긴다(물론 내 나이도 정부조직의 이런 회의에 가면 아주 어린 축에 속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좀 해봐도 될 것 같다. 

직업 특성상 대기업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데, 개인이 아니라 팀장과 팀원을 함께 만나든지 하면 단번에 그 조직문화가 읽혀진다. 관료적인지 아닌지 바로 눈에 보인다. 우리나라 대기업도 정부조직 못지 않게 관료적인 곳이 많다. 그룹오너의 해외 방문을 앞두고, 해외에서 동선을 맞추느라 세번씩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분단위로 예행연습을 했다던 모 기업 팀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의전 잘못하면 한순간에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곳 아니던가. 포스코의 여직원 성폭력 사건을 보면, 포스코의 조직문화가 한눈에 읽히지 않는가. 

젊은 세대의 삶에 대한 태도,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이 모든 것이 바뀌는데, 우리나라 조직의 의사결정권을 지닌 계층은 왜이리 변함이 없을까. 골프 아니면 술로 이어진 호형호제식 네트워크, 실력보다는 정치력이 좌우하는 사회생활, 여성을 깍두기로 여기는 ‘남성들 위주의 리그’까지. 

술(접대), 골프, 야근과 같은 비공식 채널 없이, 재택근무와 업무용 콜드콜(cold call)과 같은 공식 채널을 통한 사회생활만 존재한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을까. 

얼마 전 17년 동안 금융회사에 다녔던 한 여성의 이메일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아이를 위해 경력을 단절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얘기했을텐데, 이번에는 “그만둬도 좋고, 다녀도 좋다”고 얘기했다. 왜? 조직에서 피눈물 끝에 살아남은 여성 한명의 상징성만으로는 별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이 포스코의 여직원처럼 용감하게 고발해야 하고, 조직의 곪아터진 문제를 블라이드(blind)든 뭐든 조직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조금씩 세상이 겁을 내고 바뀌는 것 같다. 

대한민국 전체의 ‘관료화’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인지 연구조사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관료화만 없애도 GDP의 몇 퍼센트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며, 투명성지수도 몇단계 높아질 것을 장담한다. ESG의 S(소셜) 이슈에서 핵심 중 하나인 인적자원관리를 잘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관료화의 옹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부터 해결해야 한다. 최근 밀레니얼세대와의 격의 없는 만남을 위해 CEO와 대화를 나누는 대기업도 늘고있다는 언론기사를 접한다. 그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또다시 직원을 동원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스타트업처럼만 조직을 운영해도 절반의 성공은 할 것 같다. 

지금 글로벌에서는 '대퇴직(Great Resignation)'이라는 화두가 커다란 이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들이 급증하는 현상인데, 2021년 미국에서는 매달 평균 398만명이 퇴사했다고 노동통계국은 밝혔다.

MIT슬론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퇴사율이 높은 회사의 가장 큰 단일 예측변수는 나쁜 직장문화였다. 부족한 보상보다 나쁜 직장문화가 10배 이상 주요한 이직 원인이었다. 무례하고, 비포용적이고, 비윤리적이고, 경쟁이 치열하며, 폭력적인 조직문화그 그 5가지 요소였다. 

일본의 최대통신사인 NTT그룹은 다음달부터 재택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새 근무제도를 시행한다. 주요 7개 계열사 직원 중 절반인 3만명을 대상으로 다음달부터 영구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향후 18만 명의 일본 내 직원을 포함해 32만 명에 달하는 전 세계 직원들로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회사에서 2시간 이내로 통근할 수 있는 거리에 살아야 한다는 거주지 규정 제한도 철폐됐고, 사무실 출근은 ‘출장’으로 취급해 숙박비와 교통비를 준다. 비행기를 이용해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도 허용되고, 교통비 지원의 상한도 없앤다고 한다.

보수적인 조직문화의 '끝판왕'으로 여겨지는 일본이 이렇게 바뀌는 이유는, 구글 등 빅테크로 인재유출이 늘어 NTT그룹의 인재난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주의와 보수화가 만연한 우리나라 조직들도 앞으로 위기감을 느껴야 할지 모른다. 

 

p.s. 참고로 내가 언론사에 입사하기 전 첫 직장에서 막내로서 했던 일은, 국장님이 피우는 담배를 사와서 그의 책상 투명 유리병에 꽂아두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끔 본사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젊고 만만한 여직원들이 동원될 때 ‘꽃순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괴감이 많이 들던 시절이었다. 왜 20년이나 세월이 지났음에도, 조직의 막내인 신입직원, 혹은 여직원들은 똑같은 패턴의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 전체는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박란희 대표 &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