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산불에 경제까지 '위태', 美 정부기관 “기후변화는 곧 금융위기”
"10년전만 해도 기후변화가 추상적인 개념이었다면, 오늘날 기후변화가 초래한 재앙을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주 등 서부 연안을 중심으로 계속되는 산불은 ‘재해가 아니라 인재’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미국 전국합동화재센터(NIFC)에 따르면 서부 지역에서는 약 100여건의 대형 산불이 진행 중이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가뭄에 이어 주 역사상 피해규모 1·3·4위에 달하는 대형 산불 3건이 한꺼번에 진행 중이며, 워싱턴주의 산불도 최근 5일 새 크게 악화돼 16개의 대형 산불이 잡히지 않으면서 주 역사상 두 번째 최악의 산불을 맞고 있다. 이미 100만에이커(약 4047㎢) 이상이 불탄 오리건 주에서는 겨울 우기가 올 때까지 최소 8건의 대형 산불이 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연이은 산불로 사망자는 26명을 기록했으며, 서부 3개 주의 피해 면적은 1만9125㎢로 대한민국 국토 면적(10만210㎢)의 약 5분의 1(19.1%)에 해당한다. 서울 면적의 약 20배 가량이 불탔고, 50만 명 이상에게 대피령이 내려진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전초전에 해당한다. 기후 과학자들은 “10년 뒤엔 올해가 ‘좋은 시절이었다’며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P통신에 따르면, 기후과학자들은 “캘리포니아주를 덮친 가뭄과 대형 화재, 54.4℃를 기록한 데스밸리의 이상 고온, 한국과 일본을 강타한 태풍을 뛰어넘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것”이라며 “2020년의 기후학자로서 미래를 아는 것조차 두렵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이번 산불이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도하게 배출된 탄소로 시베리아에서 이상고온이 발생해 북극 바다의 얼음을 녹였고, 이 때문에 북극의 찬 공기가 남북으로 요동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따뜻한 고기압이 발달해 미국은 건조로 인한 가뭄이, 우리나라에서는 불안정한 장마전선 형성으로 장기간 장마가 내리게 된 것이다.
단순 재해 넘어 경제 근간까지 '위태'
美 연방정부 보고서 "기후위기는 곧 금융위기"
문제는 기후변화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산하 기후변화자문위원회는 9일 ‘기후변화가 금융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연방정부가 기후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기후변화는 장난”이라며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까지 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정면배치되는 내용이라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 금융규제당국이 기후변화가 미국 금융시스템에 심각하고 새로운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위험을 측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빠르고 단호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후변화가 경제 생산능력을 떨어뜨려 고용과 소득, 기회 창출이 어려워져 궁극적으로는 기후 위기가 금융위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산불로 인해 소실된 주택으로 인해 경제위기가 오는 과정을 설명했다. 지난 3주간 캘리포니아에서만 4000채 이상의 주택과 건물이 소실됐으며, 캘리포니아주 소방 당국인 캘파이어는 1200만 가구 중 약 300만 가구를 위험 주택으로 지정됐다. 위험 주택으로 지정되면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고, 이는 주택담보대출 채무 불이행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위험 주택 소지자가 채무를 갚지 못할 경우, 은행을 비롯한 주택담보대출보유자 및 부동산 시장에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금융위기 당시에도 주택담보대출에 기반한 증권이 위험의 도화선이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최악의 산불이 있었던 2018년 이후 일부 보험사들은 주택 보험 갱신을 거부했던 바 있다. 이로 인해 기록적으로 많은 이들이 고가의 보험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는데, 고가의 보험은 집값을 떨어뜨리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주 정부 입장에서도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면 해당 지역의 세수가 줄고, 이는 채무상환 능력의 저하로 연결돼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관광이 줄어들면서 주 정부의 수익이 줄어드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재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보고서는 "천천히 도래하는 구조적인 위기"라고 진단했다. 부동산 외에도 기후위기로 자산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자산 재조정이 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이는 "'폭포 효과(Cascading Effect)'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부 산업과 지역에 큰 타격을 입혀 '하위 시스템 충격'을 촉발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탄소 배출량 공시, 투자에 기후요인 고려 등
53개 권고안 제시
위원회는 금융규제당국과 의회가 기후변화로 인한 금융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체계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권고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상장사들이 탄소 배출량 등 기후 관련 공시를 하도록 정보 공개방침을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연기금과 퇴직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은 투자 시 기후 관련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방준비제도(Fed) 등 금융당국은 지방자치단체나 기업 자산 매입 시 ‘기후 위기’를 부채 항목에 포함해야 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53개의 권고안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의회는 탄소세 부과 방안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며 “금융당국은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이해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더욱 긴급하고 결단력 있는 자세로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더불어 “기후변화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칠 중대한 리스크”라고 거듭 강조했다.
경제적 손실 증가는 당연한 수순
국내도 기록적 장마, 금융위 "기후리스크 인식하겠다"
기후위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지난 10년간 증가해왔다. 유엔(UN)에 따르면 최근 20년간(1998~2017년) 자연재해로 인한 전 세계의 경제 손실액은 2.9조달러(약 3445조원)로, 이전 20년(1978~1997년) 간 손실액 0.9조(약 1069조원)의 약 2.5배 증가했다.
이에 따른 경고는 지난 10년간 꾸준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01년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피해가 1950년 대 연 30억달러에서 21세기 매년 1000억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세계은행은 2013년 21세기 들어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IPCC 예상치보다 갑절이나 되는 연간 2000억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엔 산하 책임투자원칙(PRI)은 “기후변화로 인해 글로벌 증시 시가총액 2조3000억달러(약 2727조원)가 증발할 수 있다”고 추산한 바 있다.
이런 지적들 속에서도 기후변화는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직접적인 리스크로 인식되지 않았다. 보고서는 “지금까지 금융 시장은 기후리스크에 대한 가격을 책정하지 않았다”며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없다면, 자본은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며 기후변화는 현실적 위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도 이에 자유롭지 않다. 올 여름을 강타한 기록적인 장마와 연속된 태풍들로 자산가치의 하락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녹색금융 추진TF를 구성하며 기후금융 리스크에 대한 인식전환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기후변화는 확실한 금융리스크”라며 “기후금융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금융위원회가 앞장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최근 금융연구원에 ‘기후금융’과 관련한 연구용역을 발주, 기후금융과 금융권 리스크, 외국의 사례, 감독기관의 대응 방안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