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美 IRA 법안은 명백한 보호무역주의"
자국 기업이 미국에서 보조금 받지 못하는 건 역차별
유럽연합(EU)이 도입한 탄소국경세에 이어 제2의 무역 불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현대자동차에게도 불똥이 옮겨붙은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이하 ‘IRA’) 때문이다. 프랑스는 IRA 법안이 시행되면 최소 80억유로(약 11조원)의 손실을 입을 수 있다며, IRA에 맞서 ‘유럽 구매법(Buy European Act)’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바이든 행정부의 3700억달러(약 528조원) 규모 기후 법안을 둘러싸고 EU와 미국의 무역 전쟁 위협이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4년간 이어진 앙숙 관계를 바이든 행정부가 끝내려고 했지만, 이번 법안으로 다시 무역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IRA 법안에는 미국제 전기차 구매자에 대한 세금 환급뿐 아니라 태양광, 풍력, 원자력, 탄소 포획 기술과 같은 녹색 기술에 세금 공제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EU는 역내에서 생산된 제품이 녹색 기술을 촉진하고 탄소 배출을 해결한다며, IRA에서 예외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미국이 전기차 등 녹색 기술에 제공키로 한 보조금을 EU 제품에도 동일한 수준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IRA 법안이 부당한 보호무역주의라 경고
특히, 프랑스는 IRA 법안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프랑스는 최근 몇 주 동안 IRA 법안이 부당한 보호무역주의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정부에 따르면, 자국 기업이 인센티브를 위해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할 경우 80억유로(약 11조원)의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추산한다.
프랑스는 미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자국 기업에 대한 근심이 크다. 프랑스 대표 자동차 기업인 스텔란티스와 르노는 생산시설 상당수를 유럽에 두고 있다. 이들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한 EU 정책에 따라 전기차 생산에 많이 투자했는데, IRA 법안이 적용되면 미국 시장에서 손실을 볼 수 있다.
미국은 현지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최대 7500달러(약 1071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프랑스는 전기차 구매자들에게 제조업체 상관없이 최대 7000유로(약 988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풍력 사업도 영향권 내 있다. 미국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은 지난해 프랑스 셰르부르 공장에서 풍력 터빈 블레이드를 생산함으로써 유럽에서 재생에너지 사업을 확장했다. 프랑스에서는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자국 기업이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의견이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채널2에 출연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유럽이 자유무역 정책을 고수하는 건 순진한 발상”이라며 “미국처럼 유럽 구매법(Buy European Act)이 필요하며, 유럽 제조업체를 위해 국가 보조금을 따로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재무부 관계자는 “EU 집행위원회에 IRA 법안 대응을 촉구했으며, 다양한 옵션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양한 옵션에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보복관세 또는 EU에서 만든 제품이 미국 리베이트 제도의 일부가 되게 면제를 요청하는 방안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주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와의 샴페인 대담에선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제도는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옮기도록 설득하는 시장을 교란하는 조치”라며 “미국이 철수하지 않으면 EU는 반격해야 한다”는 IRA 법안 대응 원칙을 협의하기도 했다.
독일의 화학기업인 바스프 또한 미국의 6배에 달하는 휘발유 가격 인상과 EU의 규제 강화로 독일 내 사업활동 축소와 일자리 감축 계획을 발표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EU 회원국들, 각국에 미칠 잠재적 피해 계산 중
전통적으로 무역 분쟁에서 미국에 맞서는 것을 꺼려한 독일이 프랑스의 움직임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IRA 법안이 무역 분쟁으로 격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다만, 미국 폴리티코는 “이런 움직임은 새로운 무역 전쟁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U와 미국은 지난주 IRA에 관한 워킹그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고, 미국은 “EU 생산자의 기회와 우려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EU 회원국들은 각국에 미칠 잠재적 피해를 계산하고 있다. 지난주 대사 회의에서 피해 사례 유형을 나누고, 구체적인 조치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했다.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미국이 EU 상품에 예외를 둔다면, EU 기업들은 역내에서 사업을 유지해 수익과 녹색 일자리 손실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국이 이 규칙을 관대한 방식으로 적용하기 원하며, 그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고 덧붙였다.
프랑스가 언급한 유럽 구매법에는 EU와 독일 모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취하는 모든 조치는 WTO 규정에 부합해야 한다”며 “유럽과 미국은 회담을 통해 이견을 해결해야 하며, 전 미국 대통령 시절 경험했던 것처럼 맞불 무역 조치로 빠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독일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 또한 “유럽이 자체 보조금 제도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된다”며 “대응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기업이 유럽에 투자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