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스튜어트 커크의 날선 비판
깜빡거리는 노트북의 커서가 빨리 원고를 써내라고 독촉하는데, 어떤 날은 글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고구마 몇 개 먹은 것인양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들한테 물어보면, 그 비결은 늘 하나입니다. 일단 노트북을 켜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무조건 쓴다! 생각만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뭔가를 일단 하라는 조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유명작가들의 일상도 그래서 아주 단조롭습니다. 회사 출근하듯이 매일 글을 조금씩이라도 쓰니까요. 뉴스레터가 아니면 마감이 없어서, 오늘처럼 글쓰기 싫은 날은 패스할텐데, 이렇게 뭐라도 쓸 작정입니다.
HSBC 전 책임투자 책임자 스튜어트 커크의 새 칼럼
오늘은 전 HSBC의 스튜어트 커크가 쓴 칼럼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알다시피 스튜어트 커크는 전 HSBC의 최고 책임투자책임자였고, 파이낸셜타임즈의 기자로도 활약했던 인물인데, FT의 ‘모럴머니’ 컨퍼런스에서 했던 냉소적인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회사를 그만둔 인물입니다. FT의 컨퍼런스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스튜어트 커크를 백수로 만들었으니 좀 부담이 되는 것일까요. FT는 매주 토요일 발행되는 FT Money 페이지를 재개하면서, 스튜어트 커크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이 칼럼 또한 큰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넷제로에 대한 은행의 접근은 단순한 함정(The banking approach to net zero is just claptrap)”이라는 것입니다. 숫자는 허튼소리에 불과하고, 고객들은 암암리에 방치되고 있으며, 실제 세계에 미치는 넷제로 영향은 미미하다는 날선 비판입니다.
그는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책임투자 책임자로서 부과된 함정 중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것인 넷제로 목표였다”며 “탈탄소라는 거대한 도전에 대한 우리 업계의 반응은 금융분야에서 30년 동안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것들 중 하나”라고 밝혔다.
“전 세계가 기후파국을 막기 위해 1.5도 이하로 지구 온도 상승을 제한하자”는 2015년 파리협정이 맺어진 이후, 투자자들은 에너지 전환에서 자신들도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거기서부터 ‘자금조달 배출(financed emissions)’의 개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기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기본적으로 탄소배출을 방치하는 것과 비슷하며, 자본도 넷제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자금조달 배출을 감축하면, 지구에 도움이 될까?
스튜어트 커크는 이 대목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면 ‘소위 더러운 금융(dirty finance)’을 감사하는 회계법인은 넷제로가 되어야 하는가" "이들을 고용한 헤드헌터는?" 즉, 어디까지 넷제로에 대한 범위를 정할 것인지, 어디서 멈출지에 대한 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70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400여곳의 자산운용사, 소유자들이 모여있는 이니셔티브인 '넷제로자손운용사 이니셔티브(NZAMI, Net Zero Asset Managers Initiative)'에 모두 서둘러 참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서명하고, 특정 날짜까지 자금조달한 배출량을 일정 비율 줄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베코(Robeco)는 2025년까지 30% 감축을 약속했고, 2050년까지 50%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신한금융그룹, KB금융그룹 등 많은 금융권에서 자산의 포트폴리오 배출량을 넷제로화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배경도, 이러한 글로벌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튜어트 커크는 “이러한 계획들이 배출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구요? 결국 자산의 소유자가 은행에서 사모펀드나 다른 대체자본시장으로 넘어갈뿐, 세상에 미치는 실제 영향은 제로에 가깝다는 겁니다.
“거래자산에 대한 등급을 매김으로써, 총체적인 산업 구조조정을 하라는 기후변화에 관한 기관투자자그룹(IIGCC)의 요구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 “금융권이나 자산운용사가 자금조달 배출량의 30% 감축을 약속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넷제로 이행 과정, 너무 많은 변수 존재해
금융권의 요구대로 기업이 넷제로 약속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넷제로 경로를 직접 계산하려고 하고는 있지만, 스튜어트 커크는 “그 전망의 배경에는 너무 많은 가정들이 있다”며 “지난해 유럽의 한 유틸리티 기업이 석탄에서 가스, 재생에너지로 이행하는 것을 모델링하여 2030년까지 넷제로에 도달할 가능성을 예측했지만, 정부의 에너지 안보정책으로 이러한 예측은 빗나갈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넷제로 경로는 탄소가격, 경쟁 및 규제당국 등 너무 많은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를 들어 기술주가 반등할 경우 배출량이 적은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펀드매니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포트폴리오 넷제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맹점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 상황도 가정할 수 있지요. 그는 “에너지 전환에 가장 도움이 필요한 기업, 즉 탄소배출을 가장 많이 하는 오염도가 높은 기업에 자본을 투입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강하게 반문합니다.
어떤가요. 그의 주장은 블랙록을 포함한 몇몇 자산운용사들이 계속 해서 주장하고 있는 ‘전환을 위한 이행자금’이 필요하다는 대목과 일치합니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빛과 바람 이야기 같습니다. 무조건 자금을 빼면서 ‘탈석탄’을 위협하는 방식이 기후위기 대응에 효과적일까요, 아니면 화석연료 기업에 다시 자금을 퍼붓고 전환을 유도하는 방식이 기후위기 대응에 효과적일까요. 세계는 계속 해서 논쟁을 벌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올해 COP27에 화석연료 기업의 로비스트들이 600명이 넘어 역대 최대로 많았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후대응을 늦추기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기후대응 현황을 알아보기 위한 것일까요. 후자이기를 바래봅니다.
EU, 그린워싱 규제 조사 본격 시작
어찌됐든, 전 세계 대륙에서 가장 기후위기에 관심이 높은 대륙인 유럽연합에서는 그만큼 기후금융과 ESG에 대한 자금도 가장 유입이 많습니다. 그만큼 금융기관에서는 최대한 지속가능금융, ESG금융 쪽으로 자금흐름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많다보니, 그린워싱 위험도 높아집니다.
때문에 유럽연합에서는 그린워싱에 대한 감독당국의 조사가 본격 시작됐습니다. 유럽의 3대 주요 금융규제기관인 유럽감독당국(ESA)는 은행, 보험, 금융시장 전반에 걸친 그린워싱 리스크와 관행에 관한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한 증거를 수집한다고 15일(현지시각) 밝혔습니다. ESA에는 유럽은행청(EBA), 유럽보험연금청(EIOPA), 유럽증권시장청(ESMA)이 포함됩니다.
이번 작업은 유럽위원회가 올해초 그린워싱 및 그 리스크에 관한 감독에 대해 ESA에 의견을 요청한데 따른 것으로, 지속가능한 투자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급속히 증가하는데 반해 그린워싱 리스크도 덩달아 높아지면서 이로 인해 지속가능한 금융의 신뢰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규제당국은 EU 자체의 SFDR프레임워크, 미국 SEC의 최근 제품라벨 공개규칙, 호주의 그린워싱방지가이드, 싱가포르 금융당국의 ESG펀드에 관한 정보공개 요건 등 그린워싱 규제사례들을 참고할 방침입니다. 최종보고서는 1년 후 제출될 예정입니다.
수백년 이어져온 탄소사회를 탈탄소사회로 바꾸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제도와 시스템, 사고방식, 문화의 변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시끄러운 것’ ‘논쟁적인 것’을 외면하고, 시끄러운 곳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시끄럽다는 건 그만큼 변화를 위한 갈망이 더 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유럽연합처럼 이런 시끌시끌함이 좀더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은 11월 16일(수) 발송된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수요일 칼럼을 좀 빨리 읽고 싶은 분은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