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의 ESG적 생각】 육아휴직은 그냥 ‘쉬다 오는’ 것이 아닌데

2023-03-15     임팩트온(Impact ON)

‘상대적으로’ 생각이 열려 있고, 회사 직원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 또한 진심인 A 상무. 전혀 악의 없이 육아 휴직에 들어간 B 대리의 근황을 직원들에게 묻는다. “B 대리는 언제까지 쉬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어떤 기업은 최소한의 육아휴직도 제대로 못 쓴다는데, 심지어 좋은 회사 같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쉬어. 푹 쉬다 오라 그래”라는 말도 들어본 적 있다. ‘상무님’씩이나 되지 않아도, 20~30대 직원들끼리 별생각 없이 주고받는 대화 중에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백번 양보해서 기업 임원 입장에서는 회사 일을 하지 않으니 쉰다고 표현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화법에 동의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지만), 일상 어법에서도 육아휴직자를 ‘편히 쉬는 사람’ 정도로 단순하게 정리해 버리는 습속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런 인식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광언(狂言)이 ‘맘충’이다.

 

‘휴직’이라는 단어의 부적확한 용법과 ‘육아’라는 부불노동

필자는 육아휴직 기간에 아이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가 작년에 복직한 아내의 얼굴이 스친다. 아내는 푹 쉬지 않았다. ESG가 기업경영의 화두로 부상하면서, 대기업과 금융권에서는 경쟁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모성보호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런 흐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데, 아직 우리 사회는 ‘휴직’이라는 단어의 적확한 용법과 의미도 이해를 못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휴직(休職)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기간 동안 직무를 쉼’이다. 그냥 쉬다 오는 것이면, 굳이 ‘휴’ 뒤에 ‘직’ 자를 붙일 이유가 없다. 휴직은 ‘직’을 잠시 멈추는 것이다. ‘육아휴직’은 직무를 쉬면서 육아를 담당하는 것일 터이다. 이 어렵지 않은 단어가 이상한 맥락에서 자꾸 오용된다.

임직원들의 기본적인 권리의 개념 규정에 혼동이 오면, 더 발전적인 논의는 가로막히기 십상이다. 특히 무해한 얼굴로, 분별없이 던지는 말은 적이 폭력적이다. 그런 경우 되레 정색하고 맞받기 어렵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라는 말은 사실 영양가 없는 하나 마나 한 소리에 불과하다.

ESG가 말 그대로 ‘붐’을 일으키면서, 회사 외부 이해관계자뿐 아니라 내부 임직원들의 만족도와 행복도 제고에도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정말 고무적인 현상이다. 다만 떠들썩한 임직원 가족 초청행사를 진행하거나 고가의 선물을 살포하기 전에, 회사 구성원의 정당한 권리가 그릇되게 인식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 않은지 철저히 점검해봐야 한다.

다시 말하는데, 휴직은 노는 게 아니다. 육아휴직자는 지금도 ‘육아’라는 또 다른 일에 퇴근도 없이 온종일 매달려 거사를 치르는 중이다. 육아휴직 동안 필자의 아내가 그랬고, 주변 선후배들이 그랬다. 심지어 부불노동(否拂勞動, unpaid labor)임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너무도 쉬운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서글픈 일이다.

 

담배 심부름 20년 뒤 받은 성적표, 유리천장 지수 꼴찌

작년에 “40대 후반의 워킹맘, 질풍노도인 고3과 중1의 엄마, 언론사의 편집장이면서 또 동시에 스타트업 조직의 대표, 골프 안 치는 여성”이라는 분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언론사 입사 전 재직했던 회사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했던 일 중 하나는 담배 심부름이었다. 이따금 본사 주관 행사 진행 시에는 ‘꽃순이’로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022년 유리천장 지수(Glass-ceiling index) 최하위를 기록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여성의 노동 참여율, 성별 임금격차 및 학력차이, 여성 임원 비율 등을 두루 고려해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 우리는 ‘하위권’도 아니고 ‘최하위’ 성적을 받았다. 그것도 11년 연속으로. 꾸준함은 미덕이라는데, 이런 류의 연속성은 그야말로 악덕이다. 아울러 우리(29위) 바로 위가 일본(28위)이다. 한일전의 패배가 쓰라리다.

특히 OECD 회원국 중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가 가장 컸다. 영국 과학저널 <네이처 인간 행동(Nature Human Behaviour)>의 분석에 따르면, 같은 직무(Job)·직종(Occupation)·사업장(Establishment)인데도 성별 임금격차가 주요 국가 중 최상위권인 것으로 드러났다. 성별에 따라 진출하는 분야의 차이가 있어 임금격차가 불가피하다는 등의 ‘핑계’가 설 자리를 잃는 대목이다. 여러 형태의 중층적 차별 문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2023년, 이제 담배 심부름은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진보라면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자회사인 무디스 애널리틱스(Moody’s Analytics)는 직장 내 양성평등이 실현되면 세계 총생산(GDP)이 최소 7조 달러가 증가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한화로 9000조원이 넘는 금액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런 막대한 수준의 손실을 겪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깝지 않은가? 

 

세계적인 석학이 제시한 한국의 3대 문제 - 북한, 한일관계 그리고?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는 지난해 국내 미디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이 직면한 3대 문제를 꼽았다. 첫 번째는 북한, 두 번째는 한일관계였다. 

앞의 두 개는 사실 ‘석학’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지 않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주장할 수 있는 항목이다. 그다음 위협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세 번째 요인으로 한국 사회의 성차별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2500만 인구의 나라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인구의 절반에게 공정한 대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맘고리즘. 맘(mom)과 알고리즘(Algorithm·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나 규칙)의 합성어로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어 이어지는 돌봄 노동의 고리를 의미한다. ‘맘고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말한 ‘그림자 노동(Shadow Work)’에 복무하는 우리 주변 여성 동료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외치는 ESG 경영은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이 공허함에 불편한 마음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 휘황한 대규모 ESG 행사 주최보다 선행돼야 할 과제다.


 

☞ 김민석 팀장은

김민석 팀장(listen-listen@nate.com)은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마스턴투자운용에 재직 중이다. 브랜드전략팀 팀장과 ESG LAB의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행정학·정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필명으로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서울에너지공사 시민위원,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