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탄소시장은 전쟁중?
그동안 말만 무성하던 국내의 ‘자발적 탄소시장(VCM)’ 개설 소식이 드디어 오늘 보도가 되었습니다. 대한상의가 올 하반기에 탄소배출권 인증사업을 시작하고 ‘자발적 탄소시장(VCM)’을 개설한다는 소식입니다.
탄소배출권 시장은 규제시장과 민간의 자발적시장 2가지로 나뉩니다. 현재 글로벌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왕성합니다.
먼저 자발적 시장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한국경제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모바일 D랩 ‘LPDDR5X’는 전작 대비 전력 효율이 20% 높은데, 이렇게 저전력 제품을 만들어냄으로써 탄소를 줄이는데 기여한 것에 대한 인증 크레딧(Credit)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크레딧을 정유사에 팔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대한상의는 크레딧 거래 활성화를 위해 올 하반기에 ‘VCM 거래소’를 열 계획입니다.
자발적인 탄소시장의 가장 메이저 인증기관은 미국의 ‘베라’와 스위스의 ‘골드스탠더드’ 2곳입니다. 민간 탄소시장은 왜 커지는 것일까요. 탄소중립은 해야 하는데, 당장 스코프1,2,3에서 당장 탄소를 줄일 수 없으니까 외부에서 탄소를 줄였다는 인증서(크레딧)이라도 사오려는 기업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한상의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아오라’ ‘팝플’과 같은 민간의 자발적 탄소시장 플랫폼들이 지난 1-2년 사이에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생기기만 했을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자발적 탄소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갖춰져야 할 제도적인 노력들이 제법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탄소크레딧 판매자와 구매자가 필요하고, 이러한 크레딧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검증기관도 필요하고, 판별 기준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발적인 감축 크레딧이지만 이것을 공식적인 온실가스 감축실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자발적 탄소시장, 주도권 싸움중
에코시스템 마켓플레이스에 따르면, 자발적 탄소시장은 2017년부터 2020년 사이 6배 성장했습니다. 탄소상쇄 크레딧 발급건수는 2020년에만 181만건 가량 되는데, 약 1억8100만톤의 이산화탄소 상당량에 해당됩니다. 지금 이 시장은 한마디로 ‘룰이나 규칙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축구경기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장 수요는 늘어나는데, 탄소크레딧 발행 규칙이나 표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1톤을 상쇄한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정확한 제3자 검증이 이뤄지지 않아서이지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자발적 탄소시장을 위한 무결성위원회(ICVCM, The Integrity Council for Voluntary Carbon Market)’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이 곳에서 핵심원칙과 평가 프레임워크를 발표했을 때, 베라와 골드스탠더드는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베라는 “ICVCM이 베라의 인증 업무를 가로채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ICVCM의 접근법이 기존에 존재하는 접근법보다 전문성이 더 떨어진다”며 비판했습니다. 골드스탠더드도 “더 많은 관료주의를 추가함으로써, 탄소 상쇄 크레딧 판매를 더 어렵게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자발적 탄소시장의 표준을 잡기 위해서 글로벌에서도 커다란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서 비슷한 현상을 본 것 같지 않나요? 글로벌 ESG 표준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논쟁도 비슷합니다. ISSB라는 현재의 큰 축이 만들어지기까지, 8개 가량의 ESG 표준 기관들이 대화채널을 만들어서 합병 논의를 해왔으며 GRI를 제외한 나머지 기관들은 SASB로 흡수합병되고 SASB 기준이 ISSB와 통합되기까지 꽤 오랜 논의가 있었습니다.
국제적인 시장 규칙을 만드는 것이니 이러한 논의가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국내에서도 상당히 빨리 이 시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상의가 지난 1월 만든 ‘한국형 탄소감축인증표준’을 유엔이 운영하는 국제항공부문 탄소상쇄감축협약(CORSIA) 등록해서 공신력을 높이겠다고 하니까요.
탄소상쇄 크레딧, 규제기관 vs. 산업계의 줄다리기
하지만 앞서 삼성전자의 저전력 제품을 탄소감축 크레딧으로 인정받으려면 갈길은 아직 많이 멀어보입니다. 왜일까요? 기업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부분이 바로 위 사례처럼, ‘자발적인 탄소감축을 통해 돈을 벌거나, 배출권 감축 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인데요. 전문가들은 “스코프1,2,3를 통해 배출하는 탄소를 제거하거나 감축하는 게 우선이라서, 아직 자체 감축도 어려운 마당에 탄소 상쇄를 통해 돈까지 버는 것은 요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사례와 같이 제품을 통한 탄소감축을 일부에서는 ‘스코프4’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에서는 탄소 상쇄 크레딧이나 배출권 사용을 기업의 탈탄소 전략의 핵심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탄소 제거(carbon removals)는 기업 배출량의 10%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유, 가스, 해운 등 아직 SBTi 방법론도 부족하고,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는 감축기술이나 방법론이 부족한 경우 어쩔 수 없는 탄소상쇄 크레딧을 사용해야 하는 산업군도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한 기준도 등장할 겁니다. 하지만 자발적 배출권 시장이 너무 커지면, 탈탄소 기술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까봐 유엔을 중심으로 한 온실가스 표준 제정기관에서는 이를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한 산업계에서는 자발적 시장이 커져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고요. 앞으로 이러한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 워싱턴주에서도 배출권거래제 시작
그럼 이제 규제시장인 탄소배출권 거래제 시장에 대한 최근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유럽연합과 한국은 배출권거래제(ETS) 시장이 형성돼있는 나라이지만, 미국은 각 주마다 다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이어 최근 미 워싱턴주에서 배출권 거래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블룸버그가 보도했네요. 미국에서 탄소시장은 지난 20년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전국적인 ETS시장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캘리포니아만 2013년 ETS 시장을 열었고 2014년 캐나다 퀘벡과 첫 공동거래시장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워싱턴주에서 ‘Cap and Invest’라고 불리는 탄소시장을 이번에 열었는데 연간 2만5000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고 농업과 항공산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근 뉴욕주 또한 2050년까지 주정부 전체 배출량을 85%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탄소시장을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주에선 2월 28일 첫 경매거래가 열렸는데, 모든 배출권 할당량을 톤당 48.50달러로 완판했다고 합니다. 이는 22.20달러로 시작했던 가격에 비해 2배가 넘는 금액으로, 캘리포니아와 퀘벡 공동시장의 경매에서 판매된 배출권 가격 27.85달러를 훨씬 넘는 금액이네요. 앞으로 워싱턴주는 이 탄소시장이 잘 가동하면 캘리포니아 및 퀘벡의 탄소시장과도 연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르면 올 여름 시장 통합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게 블룸버그의 보도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과연 ETS 제도가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데 기여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론도 나옵니다. 비판론자들은 “캘리포니아의 탄소 배출량 감소는 대부분 다른 기후규제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합니다. 버지니아주에서는 공화당 소송의 주지사가 주정부의 ETS시스템(cap-and-trade)을 폐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탄소를 줄이는 것이 규제인지, 시장 거래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탄소 줄이기 레이스에 돌입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국내에도 이러한 탄소시장에 대한 준비와 대응이 필요한데, AI 인력도 중요하지만 탄소 인력도 정말 많이 필요해보입니다.
참, 그리고 지난번 뉴스레터인 ‘ESG 커리어패스’에 대한 반응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 독자 피드백을 하나 공유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번 한주도 평안하세요.
“제 커리어를 되돌아 봤을 때 약 3/4 가량은 PR 업무였습니다.(언론홍보/위기관리/MPR/PI/사내홍보/SNS) 올해도 ESG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기업의 '평판'과 '이해관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까지의 커리어패스는 순탄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ESG가 기업에 내재되는 순간, 즉 기업이 ESG를 도덕적인 차원이 아닌 규제와 사업의 관점으로 보는 순간, 앞으로도 순탄할지 의문이 듭니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넷제로를 해야 한다, 탄소를 저감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인원들은 보통 홍보/CSR 영역에서 근무하는 문과 베이스의 인력들이 상당수입니다. 이들은 본인들의 주장을 실무로 옮길 수 있는 이공계적 소양이 부족하죠. 여기서 능력의 한계를 상당 부분 절감하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기후인재 쟁탈전'에 잘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탄소저감 방법론 개발과 사업 접목, 신규 사업모델 개발, 온실가스 배출 책정, 배출권 거래, 탄소발자국 산출을 위한 LCA 등 인문계 전공 출신들이 비교우위를 가지기 어려운 영역들입니다. ESG가 기업 내에서 지속가능한 커리어패스를 그릴 수 있으려면, 이러한 부분을 감안한 사전 교육과 지속적인 학습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칼럼은 한주 전 매주 수요일 발송되는 뉴스레터입니다. 칼럼을 좀 빨리 읽고 싶은 분은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