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공시 의무화 연기 두고 시끌시끌…ESG 현장 목소리는?
ESG 공시 의무화 시점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도입시기 연기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2025년으로 예정된 ESG 의무공시의 도입 시기를 3~4년 정도 늦춰야 한다는 의견서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
최근 한 경제지의 보도에 따르면, 재계와 회계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이 ESG 공시 시작 시점을 2026년으로 1년 더 미룰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부 발표 시점도 하반기에서 연말까지 미뤄진다는 소식도 나왔다.
금융위의 논의 과정이 '깜깜이'로 진행되다보니, 정작 기업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임팩트온'은 익명을 전제로, 기업 ESG 실무자 및 금융, 학계 이해관계자 6명에게 ESG 공시 의무화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금융위, 기업 공시 지침(가이드라인)부터 제시해야
국내 수출대기업 실무자 A씨는 최근 한 언론보도에서 전한 ESG 금융추진단 관계자의 발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해당 발언은 "국내 글로벌 대기업 다수가 회계연도와 공시연도를 구분하지 못했고, 기업들이 이에 2025년이 아닌 2026년을 기준으로 공시 준비를 하는 바람에 준비가 미진하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ESG실무를 10년 넘게 해오면서 회계연도와 공시연도를 분간하지 못하는 ESG실무 담당자를 보지 못했다”며 “금융위는 공시제도에 대한 책임을 기업에 돌리고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A씨는 "지금 벌어지는 혼란은 공시 지침을 빠르게 제시하지 않은 금융위에 있다"고 덧붙였다.
A씨는 "1년 유예, 3~4년 유예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으며, 정부가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통해 공시 기준과 범위 등 명확한 지침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경우 해외법인이 많고 협력업체가 다수인 경우 연결기준으로 데이터를 끌어오는 게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거나 테스트해보지 않고 무조건 공시 의무화 시점을 제시하고 밀어부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금융위가 글로벌 공시 기준을 준용한다면, 기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산업별 공시 항목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업의 ESG 실무자 B씨 또한 명확한 정부 지침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발적 공시는 ESG팀이 담당해오고 있지만, 의무공시는 사업보고서에 내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프로세스가 다르다"며 "재무팀이나 CFO를 명확한 지침 없이는 설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위가 사업보고서에 들어가는 공시 항목은 무엇인지, 도입 시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사업보고서에 들어가는 내용이 정해져야 어떤 부서에 협력을 요청해야 할지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B 실무자는 “IFRS의 회계기준을 도입하는데도 10년 가량 걸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속가능성 공시도 일괄 도입이 아닌 유예기간을 두고 시범사업을 실시해야 한다. 특히 연결공시, 스코프3와 관련된 항목은 공시 난이도가 높으므로 자율공시를 하고 3년 정도의 유예기간에 거쳐 의무공시로 점차 전환해 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위가 유예기간 동안 시범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침을 제시하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공시 지침, 허위공시 부담 완화와 공시 데이터의 시차 해결해야
공시 의무화가 진행될 때, 공시로 인해 기업의 책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기업 ESG실무자 C씨는 “지속가능성 정보를 사업보고서에 법정공시를 하게 되면 허위 공시 리스크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ISSB의 일반요구사항(S1)과 기후 관련 요구사항(S2)을 기준으로 금융위가 고려해야 할 사항을 설명했다.
C씨는 “ISSB S1은 기업들이 이미 자발적 공시를 통해 이미 하고 있기에 공시시점이 25년이든 26년이든 문제가 없다. 문제는 S2에 있는 스코프3 온실가스 배출량이다”라고 말했다. 스코프3의 배출량은 추정치이기 때문에 추정 방법론이 정당한지 여부와 계산된 값에 대해 허위 공시 리스크가 있을 수 있다. 그는 “금융위나 산업부, 환경부가 스코프3에 대한 계산에 대해 디폴트 값을 제시하고, 기업이 고유값을 사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방향으로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허위 공시 부담을 기업에 전적으로 지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C씨는 사업보고서와 공시시점이 일치되면 항목별로 어떤 데이터를 사용할지에 관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지속가능성 공시에 포함되는 온실가스 배출량 정보는 5월 30일에 확정되는데, 사업보고는 4월”이라며 “공시 시점을 통합하려면 전년도가 아닌 그 전년도의 배출량 정보를 사용하든지 배출량 정보의 확정일을 공시일보다 앞당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공시 기준 전면 도입 안 돼...
ESG 공시 거버넌스, 이해관계자 참여 확대해야
ESG 연구기관의 D 실무자는 글로벌 공시 기준을 그대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D는 “미디어에서 ISSB 공시표준에 대해 의무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국가가 채택하지 않으면 법적 효력이 없기에 의무화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ISSB 기준을 도입한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를 도입하고 있는지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D씨는 “싱가포르는 ISSB를 반영하여 2025년에 지속가능성공시를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마치 전면 도입하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D씨는 “싱가포르는 ISSB를 검토하는 것이지 전면 도입하는 게 아니다. 싱가포르는 ISSB가 기반으로 하는 TCFD 공시기준으 4개 산업에 대해 구체적 지침을 주고 공시를 실시하고 있어서 한국과는 상황도 달랐다”라고 설명했다.
학계 관계자 E씨는 “공시 기준을 만들 때 ESG 평가지표를 고려해야 한다”며 “글로벌 기준을 그대로 가져오면 우리나라 기업은 해외 투자자들에게 저평가되기 쉽다”고 말했다.
공시 기준이 제대로 세워지려면, 의사결정에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금융권 관계자 F씨는 “현재 공시 논의는 금융위ESG금융추진단, 금감원 공시마련TF, 금감원 의결권가이드라인 개정 TF가 진행하고 있고 기업공시를 담당하는 금융위의 추진단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며 “금감원은 꾸준히 의견서를 작성해 ESG관계자들에게 송부하여 피드백을 받으며 준비하고 있지만, 금융위는 의지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학계 관계자 E씨는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ESG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ESG공시는 회계업계가 주도하고 있다. ESG는 비재무지표이고 특히 환경 부문에서는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는 “ESG 공시는 재무 전문가인 회계사가 혼자 할 수 없고, 환경 전문가가 혼자 할 수도 없다”며 “지속가능성 공시제도는 하나의 업계가 독점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업계 구분 없이 다양한 ESG 전문가들과 검증된 인원이 제도 설정에 투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기관 실무자 D씨도 “금융위와 회계업계 중심으로 의무 공시를 주도하는 점에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우리가 해외 공시 제도를 준용할 때는 그 공시가 만들어질 때 의사결정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유럽이 ESRS를 만들 때는 회계업계를 비롯해서 학계, 투자업계, 산업계 등 다양한 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ESG 공시 의무화에 관한 이해관계자 거버넌스 체계 및 논의 진행과정의 투명성 등을 종합적으로 재점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