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P가 21조 감가상각한 배경? 투자자들, 기후비용 회계에 반영하라며 압력 본격화
120조 투자자그룹, 36곳 기업에 서한 보내 "기후비용 재무제표 반영하라" BP, 로얄더치셸 등 장기유가 전망 하향조정하기도
재무제표에서 기후 비용을 반영하면 어떻게 될까. 유럽과 미국의 투자자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기업들에게 관련 압력을 넣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지난주 16일(현지시각), 9조달러(120조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는 글로벌 투자자그룹인 ‘IIGCC(Institutional Investors Group on Climate Change)’는 탄소배출량이 많은 36곳의 기업에게 “회계처리 과정에서 실종된 기후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은 받은 기업은 영국 최대석유회사 BP, 폭스바겐, 루프트한자 등 유럽 대표기업 36곳이다.
23페이지에 달하는 공개 서한에는 “‘파리 기후협정’이 향후 기업 수익에 미칠 영향을 반영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에너지기업부터 항공기업까지 수십억 달러가 한꺼번에 날아가버릴 수 있다며, 기존의 대차대조표에는 넷제로 전환에 따른 유가나 탄소세, 화석연료 자산의 수명단축 등과 같은 변수들이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문서를 작성한 나타샤 랜델 밀스(런던 소재 자산운용사 대표)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파리기후협정과 연계된 회계문제는 자본 흐름을 전환하고 재배치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BP와 로얄더치셸은 왜 장기유가 낮췄나
이 문서에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BP와 로얄더치셸(Shell)이 등장했다.
2019년 11월, 약 20명의 기관투자자들은 BP와 로얄더치셸 감사위원회 및 주요 감사파트너들에게 성명서를 작성했다. “대차대조표 상 자산과 부채의 가치평가를 제대로 뒷받침하거나, 손익계산서 상의 감가상각 항목에 투입되는 주요 가정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를 반영하라는 압력이었다. 그 결과, 두 회사는 향후 상품가격을 결정하는 주요 가정인 장기 유가를 낮췄다. BP는 장기 유가를 75달러에서 70달러로 낮췄다. 셸은 북해산 브렌트유 2022년 전망치를 기존 70달러에서 60달러까지 낮추고, 북미 셰일가스 지표인 헨리허브가스는 100만Btu(MMBtu·25만㎉의 열량을 내는 가스량)당 3.5달러에서 3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로얄더치셸의 감사인인 회계법인 EY는 대차대조표에서 에너지 전환으로 고려한 핵심 사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석유 및 가스 매장량 추정치를 감안한 자산 고갈 및 감가상각 비용(2019년 193억 달러 규모), 폐기 및 복구 충당금(1990억 달러) ▲탐사 및 생산 자산의 회수가능액(조인트벤처와 관계사 각각 1650억 달러, 230억 달러) ▲자산의 회수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원유 정제이익 추정(560억 달러) ▲이연 법인세자산의 인식 및 측정(280억 달러) 등이었다. EY에 따르면, 이 항목들을 종합하면 2019년 대차대조표에 기재된 총자산의 최소 3분의 2에 해당하며, 이는 자본의 거의 145%에 해당한다.
EY는 “현재 사후처리 및 복구 충당부채가 전체 부채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다”며 주주들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셸의 상품 가격에 대한 가정을 석유의 경우 70달러에서 60달러로, 가스의 경우 3.5달러에서 3달러로 낮추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기후를 고려하여 제3자 데이터에 의해 보증된다고 판단했다”고 적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로얄더치셸은 2분기에 150억달러~220억달러(18조~27조원)의 세후 비현금성 감손비용(non-cash impairment charges)이 발생할 것을 밝혔다. 감손비용이란 향후 보유자산 가치나 수익이 큰 폭으로 감소할 것을 예상해 미리 회계에 손실로 처리해두는 돈이다. 로얄더치셸은 1분기 배당금도 전분기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줄였는데, 배당 축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투자자그룹, "이사나 감사인이 기후변화 반영 공시토록" 압박
BP의 경우 감사인 딜로이트는 “가장 낮은 유가를 가정한 상태에서 업스트림 석유 및 가스 비유동자산 123억달러, 이보다 더 낮은 위험에서 334억 달러를 추가로 식별했다”며 “이는 전체 비유동자산의 3분의 1을 조금 넘거나, 자본의 45%를 약간 넘는다”고 설명했다. BP는 올 6월 연례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장기 유가 전망치를 또 한번 더 낮췄다. 석유는 60달러에서 55달러로, 가스는 3달러에서 2.9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이후 BP는 최대 175억달러(약 21조1000억원) 규모의 자산을 감가상각 처리하기로 했다. 이는 BP가 보유한 원유와 가스전 장부가치의 12%에 해당된다. BP가 2010년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딥워터 호라이즌’ 시추선 폭발사고 당시 단행한 320억달러(약 38조6000억원) 상각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번 상각이 이뤄진 이유는 BP가 유가 장기전망치를 종전 배럴당 70달러에서 55달러로 30% 낮춘 데 있었다.
IIGCC는 이번 문서의 결론을 통해 “이사나 감사인은 기후변화를 반영한 회계를 공시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투자자들은 이에 관여(engagement)하거나 투표(voting)하고, 최악의 경우 지분을 매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유럽중앙은행(ECB) 또한 최근 성명을 통해 2022년 기후변화에 따른 위험을 어떻게 회계처리할지 대차대조표에서 반영토록 하고, 이를 심층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초부터 새로운 접근법에 대한 논의를 본격 시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또한 이달 초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금융시장 안정을 해치는 위험요인임을 밝힌 바 있다. 연준이 기후변화를 금융시장의 위험요인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기사에는 김환이 에디터가 함께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