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사의 이슈 리뷰】무재해 기록 행진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란
회사에 다닐 때 ‘무재해 4000만 시간 달성’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쓴 적이 있다. 4000만 시간이란 천문학적인 숫자가 가늠이 안되어 개인의 일생으로 따져보니 4500년이 넘는다. 단군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웠던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 이런 수치가 나올까. 무재해 기록을 달성한 건설 현장에서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시간 동안 일한 사람 숫자를 모두 곱해서 나온 수치였다. 즉 24시간Ⅹ365일Ⅹ5000명=4380만 시간이다. 효과적인 홍보를 위한 기발한 숫자 만들기였지만, 연인원 5000명이 일하는 현장에서 대략 3년 동안(주 52시간 기준)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아야 가능한 기록이니 그것도 대단했다.
6000만 무재해 기록 vs. 매년 2000명 사망의 아이러니
2000년대 중반 이후 국내 기업들의 대형 해외 건설공사가 늘어나면서 이제 4000만 시간은 명함도 못 내민다. 녹색 검색창에 무재해 키워드를 치면 6000만 시간 무재해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숫자의 무재해 기록 퍼레이드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중대재해 발생이 가장 높은 국가라는 불명예 기록을 갖고 있다. 아직도 매년 산업 현장에서 2000명 이상이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다. 무재해 기록과 중대재해 1위가 교차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대재해 기업과 경영책임자 처벌을 골자로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이 뜨거운 이슈다. 민주당이 1월8일로 예정된 임시국회 회기 내에 이 법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한 데다,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의 단식이 어느덧 20일을 넘기고 있어 아마도 중대재해법은 다소간의 조정과 타협, 이해관계자들의 반발과 갈등은 있겠지만 입법이 유력하다. 중대재해법이 발의되면 2020년 1월 초 시행된 이른바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에 이어 1년만에 중대재해 기업과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강력한 법적 근거가 만들어지게 된다. 노동계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처벌조항이 생겨난다.
중대재해법의 입법 취지에 십분 공감하고 이 법에 힘입어 중대재해가 줄어들기를 희망하면서도 ‘왜 노동계에서는 기업과 경영책임자 처벌을 저토록 원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급속한 산업발전 과정에서 한 때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한 적도 있었고, 산재가 발생해도 산재보험 요율 상승과 노동부 조사를 회피하기 위해 공상 처리하던 관행, 심지어 무재해 기록달성과 표창 수상을 위해 산재사고를 은폐하기까지 했던 어이없는 해프닝에 이르기까지 기업들의 부끄러운 과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진상 조사나 재발방지보다는 책임 회피에만 연연했던 기업들의 모습이 오랜 세월 동안 고착화되어 결코 쉽게 허물 수 없는 ‘불신’의 벽을 쌓았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기업이나 경영자에게 무거운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직접적인 업무상 과실이 입증된 경우가 아니면 경영자가 구속되거나 기업이 거액의 벌금을 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지난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되자 기업 일각에서는 ‘이제 자칫하면 대표이사가 감옥에 갈 지도 모른다’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공기업 적용중인 2% 안전관리비, 민간에도 시행해야
기업과 경영책임자 처벌 초점 아쉬워... 안전 투자와 마인드 변화 중요
중대재해법이 제정됨으로써 강력한 처벌규정 때문이라도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중대재해 예방에 경각심을 갖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민주노총의 표현대로라면 산업현장에는 이미 ‘위험의 외주화’가 구조화되어 가장 안전에 취약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거나 대기업의 2차, 3차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중대재해법의 이면에는 이들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중대재해에 대해 대기업이 관심을 갖고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한 주장이겠지만, 왜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대기업이 나서야 하나.
산재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작업자의 부주의까지도 시스템을 통해 제어할 수 있는 투자가 필요하다. 고(故) 김용균 씨 사고는 작업자가 위험구역에 접근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야 했다. 제철소의 노동자는 비록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더라도 용광로에 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일정한 비용이 소요된다. 전문가들은 산재 예방을 위해서는 시스템(규정과 매뉴얼, 위험평가 등)과 안전설비투자, 그리고 교육과 점검을 위한 전문인력 운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중소 업체들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산재 사고 예방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현재 건설업종에 적용하고 있는 ‘안전관리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건설업에서는 공사 발주 시 낙찰금액과는 별도로 안전관리비를 사후에 의무적으로 정산하도록 하고 있다. 민간 기업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공기업들은 대략 공사금액의 2% 내외인 안전관리비를 해당 업체가 적극 사용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이 안전관리비로 안전설비를 설치하고 보호장구를 구입하고 안전관리 인력을 운영할 수 있다. 공기업에서 이미 적용하고 있는 안전관리비가 민간기업에서도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실효성을 높이고 이를 건설업 다음으로 중대재해 발생이 높은 제조업, 광업 등으로 확대하는 방안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 기업들이 산재예방시스템을 갖추는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즉, 이제는 안전에 소요되는 비용도 재료비나 노무비처럼 생산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원가로 생각해야 한다.
중대재해법의 입법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기업과 경영책임자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한편으론 안타깝다. 대기업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이나 징벌적 배상 못지 않게 산재 사고 예방을 위한 투자와 경영자의 마인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SG 측면에서 보면 우리 기업들도 안전을 결과로만 판단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개선하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글로벌 선진기업처럼 일하는 문화에서부터 안전의 세부 원칙에 이르기까지 경영진이 논의하고 필요하면 이사회에 상정하는 등 안전 경영에 나서야 한다.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에 대한 경영의 우선 순위를 높이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임직원들과 협력업체들이 안전에 쏟는 경영진과 이사회의 노력을 직접 체감하도록 한다면, 그런 기업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중대재해도 줄어들고 비로소 노동계의 뿌리깊은 불신도 허물어질테니.
그 무엇도 하루 아침에 바뀌진 않는다. 정부가 2019년 공공기관부터 시행하고 있는 위험작업장 ‘2인1조’ 의무화는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새해를 맞아 산업안전보건법이나 중대재해법을 계기로 대기업 경영자들이 협력업체를 포함해 자신들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재해 예방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안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길 기대해본다.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이슈 리뷰】코너를 통해, ESG와 관련한 다양한 기업 이슈를 담아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