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 리스크가 국가 경제 피해가 되다, 말레이시아의 강제노동
진공청소기와 공기청정기 부품을 생산하는 말레이시아 하청업체 ATA가 인권 침해 등으로 거대 원청인 다이슨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당한지 한 달이 지났다. 이들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로이터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인권위원회와 협력해 ESG 관행을 개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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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는 지난 12월 ▲강제노동 ▲노동시간 미준수 등으로 올 6월 1일부로 계약을 종료한다는 다이슨의 통보를 받은 바 있다. 당시 ATA는 “자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으며, 말레이시아 정부까지 나서 “노동당국을 통해 진상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달, 말레이시아 인권위원회 조사결과 초과근무를 한 직원의 사례가 발견됐다. 강제노동 의혹에 대해서도 인권위원회가 직접 검증에 나섰다. ATA는 “노동 감사를 위해 직원을 지도한 관리자에 대한 조치를 취했으며, 인권위로부터 제공받은 개선 피드백을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았지만,근로자를 위한 고충 처리 채널을 추가로 시행하고, 이주노동자에게 수수료를 받고 일자리를 알선한 브로커를 해고했다. 또 직원을 위한 의료 클리닉을 운영하며 커뮤니케이션 이슈도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 당국은 조사를 통해 ATA에 4건의 노동범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ATA는 모든 위반 행위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고소를 취하할 것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미 지난 2년 반 동안 말레이시아의 세계 최대 장갑 제조업체인 탑글로브와 사임다비 등 팜유 생산업체 등 7개 기업이 강제노동 혐의로 미국으로부터 수입금지 조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만성화된 강제노동 문제
이제는 국가 경제 리스크로 작용
말레이시아 기업의 이주노동자 인권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2020년 인권과 ES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전엔 문제(problem)에 그쳤던 것이 국가 경제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리스크(risk)로 번지게 됐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빈번해지는 것을 넘어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으면서다.
ATA가 다이슨에게 보낸 항의서한을 보면 기업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ATA는 “이번 강제노동 혐의는 말레이시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일반적 관행이었던 행위에 (자사가)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2020년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세계 최대 의료용 장갑 제조업체인 말레이시아의 ‘톱글로브(Top Glove)’에서 2500여명에 달하는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바 있다. 감염자의 80% 이상은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로, 대부분 비좁은 숙소에 거주하면서 하루 12시간 2교대로 주6일간 일해온 것도 덩달아 문제가 됐다. 이 일로 블랙록과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는 이사 재선임에 반대표를 던졌고, 결국 지난해 강제노동 혐의가 명확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홍콩 시장 상장도 좌절됐다.
팜유 농장의 이주노동자 강제 노동 문제는 작년만 해도 7곳애서 불거졌다. 작년 1월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는 말레이시아 팜오일 생산 1위 업체인 사임다비(Sime Darby)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사임다비 노동자들이 성폭력과 육체적 폭력, 이동 제한 등의 심각한 인권유린에 노출됐다는 증거를 확보하면서다. 사임다비는 결국 수입금지 대상에 올랐다.
올해 6월엔 또 다른 팜유 기업 IOI 그룹이 강제노동 의혹에 휩싸였다. 농장 관리자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높은 일자리 알선 비용을 브로커에게 상납하고 있다는 서한이 CBP에 전달되면서 아직 조사를 받고 있다.
국가 차원 제도적 해결 방안 마련 시급
일방적인 기업 탓은 문제 해결 어려워
말레이시아는 태국, 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세안 역내 최대 노동력 수입국으로 제조업과 건설업, 농업 등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20년 말 말레이시아의 이주노동자는 약 200만명, 전체 노동력의 10%에 달한다. 불법체류자까지 따지면 400만명이 넘어간다.
그러나 정부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수출 의존적 경제구조 탓에 노동력 절감을 위해선 저렴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인건비를 앞세워 반도체, 아이폰 부품, 의료용 장갑, 팜유 등을 대거 수출하며 세계 공급망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으로부터 강제노동 혐의를 받은 ATA, IOI 그룹 등은 모두 국내로 치면 삼성전자 급의 대기업에 속한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잇단 강제노동 의혹에 과도한 초과근무, 임금 체불, 휴일 부족,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등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에 해당하는 11가지 지표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법에도 ILO 규정과 충돌하는 조항이 살아있다. 말레이시아 노동법은 주당 최대 60시간 이상의 노동 시간을 허용하고 있으며, 휴식일의 노동도 허용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난달에서야 2030년까지 강제노동 관행을 없애기 위한 국가 행동 계획을 시작했다.
런던에 본사를 둔 윤리적 무역 컨설팅 회사인 임팩트는 “말레이시아는 이제 강제노동 문제의 상징이 됐다”면서 “정말 경제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임팩트사는 강제노동이 이슈가 되면서, 자산관리사와 사모펀드 회사 등 글로벌 투자자들의 질의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태국을 포함한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도 강제노동 의혹이 불거졌지만, 말레이시아의 경우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대상에 오르면서 집중 관리 대상으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인의 직접투자 및 원청과의 공급계약에 차질을 미칠 수도 있다.
피치 레이팅스 지속가능금융 네카 치케 오비 국장은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법안 마련과 집행력은 정부의 몫이며, 더 나은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는 기업의 몫”이라며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말레이시아 내 이주노동자들의 권리회복연합(R2R) 라니 라시아 활동가는 뿌리 깊은 문제를 지적한다. 인권문제를 대하는 선진국의 태도다. “수출 의존도가 70%인 말레이시아는 이 지역의 다른 저임금 경제와 경쟁하기 위해 임금을 억제한다. 신기하게도 공급망에서의 임금 억제, 개발도상국의 수백만 노동자의 착취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 지표로 등재되지 않고, 미국 CBP에 의해 소집되지 않는다”라며 “말레이시아의 이주노동자들은 글로벌 대형 브랜드들의 초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노예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쥐어 짜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