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디지털 여권'으로 공급망 전체 추적하나
포장 폐기물 법률 개정에 제품 포장에 디지털 여권을 포함하는 방안 고려
앞으로 유럽연합(EU)에 유통되는 전자제품뿐 아니라 섬유, 가구 등에도 디지털 여권이 도입될 예정이다. 디지털 여권은 상품 제조과정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와 부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태그다. 디지털 여권은 순환경제를 확산하기 위한 핵심 의제로 추진될 전망이다.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현지 언론 유랙티브(Eurativ)에 “11월 30일 포장 폐기물에 대한 법률 개정에, 제품 포장에 디지털 여권을 포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EU는 내구성과 수리가능성을 높인 녹색 제품에 대한 단일 시장 규칙을 만들기 위해 순환경제 규칙을 개정 중인데, 디지털 여권이 이 규칙의 핵심 의제가 될 전망이다.
디지털 여권은 모든 종류의 소비재에 사용되는 원자재의 성분과 출처를 추적할 수 있는 일종의 태그다. 제품별로 여권과 유사한 ID 번호를 부여받으며, 소비자는 제품 포장지에 인쇄된 QR코드나 바코드를 통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기사: EU, USB-C 타입으로 충전기 통일... 디지털 여권도 도입한다
디지털 여권은 지난 3월 30일 채택된 에코 사인 규정(ESPR)에 포함된 내용이다. 현재 ESPR에는 디지털 여권 도입 대상으로 전자제품만 명시됐지만, 디지털 여권이 주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섬유, 가구 등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ESPR은 생산자가 더 많은 순환 제품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는 생산자 책임 원칙을 명시한다. 생산자가 제품 내구성을 보증하고, 제품을 수리하기 위한 예비 부품의 가용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관련기사: EU, 지속가능제품 표준 위한 4대 패키지 발표...(1)에코디자인
디지털 여권은 2026년부터 저장용량 2킬로와트시(kWh) 이상인 모든 충전식 산업용 및 전기차 배터리에 자체 배터리 여권을 의무화하는 ‘배터리 규제(Battery Regulation)’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배터리 디지털 여권은 각 제품에 고유 식별 번호를 부여하고, 배터리의 내구성과 성능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관련기사: EU 지속가능 배터리법, 언제 적용되나…최종 합의 앞두고 줄다리기
관련기사: '배터리 여권'을 주도하려는 독일, 먼저 움직인다
싱크탱크 유럽정책센터(EPC)의 스테판 십카 정책분석가는 “디지털 여권은 제품 가치사슬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이어,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에 포함된 생산지나 환경 정보를 추적한 내용을 소비자에게 공개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신뢰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업으로서는 소비자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좋은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데이터 보호와 지적 재산권 문제 있어
EU의 기업, 시민단체는 디지털 여권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다만, 데이터 보호와 지적 재산권 문제가 있다. 누가 어떤 종류의 정보를 보는지 모르기 때문에 기업의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켈 인스티튜트의 마크 미스트리 공공정책 매니저는 “산업계 밖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 공개가 왜 민감한지, 왜 모든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아야 하는지 이해 수준이 다를 수 있다”고 짚었다. 가령, 상업적으로 민감한 정보, 즉 기업이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요소가 디지털 여권에 포함된다면 기업이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본다.
유럽정책센터(EPC)의 스테판 십카 정책분석가 또한 이런 지적에 공감하며, 공개되는 정보뿐 아니라 누가 이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지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다지만, 소비자 중 화학물질에 민감한 재활용업자나 수리업자가 포함될 수 있고, EU 규정에 따라 제품이 관리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법 집행기관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데이터는 목표 그룹에 따라 접근 수준을 달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터리 여권 도입 당시 다양한 논의가 나왔기 때문에, 이 또한 조정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2017년 배터리 규제가 논의되기 시작할 때, 업계는 유럽 배터리 동맹을 결성하며 배터리 디지털 여권 도입 논의에 참여했다. 업계는 여권 도입으로 배터리 재활용이 쉬워지고, 제품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급망 전체를 추적하면서 소유권과 책임이 명확해질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스테판 십카는 “유럽 배터리 동맹은 배터리 여권 도입을 위한 길을 열어줬고, 정책 입안자들과 산업계가 개발에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배터리 여권에 포함되는 정확한 요건과 정보 범위는 2024년 말까지 별도의 기술 구현 규칙에 규정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