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12개 주, 美 20개 대형 로펌에 DEI 관행 자료 제출 요구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는 12개 주 정부가 지난 3일, 대형 로펌 20곳에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관련 고용 관행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고 로이터통신은 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각 로펌은 오는 15일까지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에 기반한 채용 및 승진 기준 ▲인턴십 선발 방식 ▲급여 책정 구조 ▲수치화된 다양성 목표 설정 여부 등을 포함한 상세한 정보를 제출해야 한다.
공화당 주 연합, DEI 관행 정보 요구...대형 로펌, 합의파 vs. 소송파 반으로 갈려
이번 조치는 지난달 17일(현지시각)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가 동일한 로펌들에 보낸 조사 요청을 토대로 추진됐다. 텍사스주를 포함한 공화당 성향의 12개 주는 EEOC의 질의서에 담긴 내용을 근거로, 일부 로펌이 연방법 및 주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EEOC의 안드레아 루카스 위원장 대행은 “일부 로펌이 인종, 성별, 성적 지향에 따른 수치화된 채용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홍보한 점은 고용 차별 금지 원칙에 반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텍사스주 법무장관 켄 팩스턴은 “DEI라는 반미국적인 이념에 따라 벌어지는 고용 차별은 명백히 불법이며 즉각적으로 중단돼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이 광기를 끝내고 평등한 기회를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현지 매체인 텍사스보더비즈니스(Texas Border Business)에 따르면, 팩스턴 법무장관은 이번 조치가 주정부 차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DEI 해체 기조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며, 필요시 법적 제재도 검토할 것이라고 시사했다.
이번에 이름이 거론된 로펌 중 일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이미 합의를 통해 DEI 방침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캐든 압스(Skadden Arps) ▲밀뱅크(Milbank) ▲폴 와이즈(Paul Weiss) ▲윌키 파 앤 갤러거(Willkie Farr & Gallagher) 등은 대통령령에 따라 DEI 차별을 중단하고 공익 법률 서비스 확대와 정치 성향을 이유로 한 고객의 배제 금지 등을 약속했다.
반면, ▲퍼킨스 코이(Perkins Coie) ▲윌머 커틀러 피커링 헤일 앤 도어(WilmerHale) ▲제너 앤 블록(Jenner & Block) 등은 대통령령을 위헌으로 보고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며, 현재 일부 조치에 대한 집행정지 명령을 얻어낸 상태다.
ESG 주주결의안 감소...주요 안건에는 여전히 DEI 포함
미국 정치권이 DEI에 대한 제재를 포함한 반(反)ESG 기조가 확산되면서 미국 내 기업 주주총회에 제출되는 ESG 관련 주주제안 수도 크게 줄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주주행동주의 단체 애즈유소우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2월 기준 ESG 주주제안 수는 총 355건으로 2024년 같은 시점의 536건, 2023년의 542건보다 감소한 것으로 확인된다.
애즈유소우는 특히 기업들이 정치적 리스크로 인해 철회하고 있는 DEI 목표도 여전히 주요 주주제안의 핵심 안건으로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애즈유소우의 앤드루 베하 CEO는 “기업들이 스스로 내건 다양성 목표조차 정치권 눈치를 보며 철회하는 현상은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오히려 지금은 DEI를 더욱 집중적으로 지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산운용사 머시 인베스트먼트 서비스는 지난 해 포드가 자사 DEI 정책을 조정한 뒤, 해당 변경의 사전 분석 결과와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절차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라는 주주제안을 냈다. 머시 인베스트먼트 서비스의 주주보호 담당자 맥스웰 호만스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DEI 정책이 사회적 신뢰와 브랜드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결정 과정에 대한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유럽 금융사도 DEI 목표 철회…영국 정부는 더딘 진전에 문제 제기
DEI를 둘러싼 긴장감은 미국을 넘어 유럽의 금융사들 사이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일부 다국적 금융사는 트럼프 행정부의 DEI 규제 강화, 보수 성향 소비자의 불매운동 우려, 정치적 리스크 등을 이유로 DEI 목표를 조정하거나 철회하고 있다.
스위스의 UBS는 최근 연차보고서에서 그간 유지해 오던 여성 관리자 비율, 소수인종 채용 목표 등의 수치를 모두 삭제했다. 대신, UBS는 능력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정치적 편향을 지양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독일의 코메르츠방크는 2024년까지 여성 리더십 비율을 2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7월 기준 실제 수치는 약 20% 초반에 그쳐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나틱시스(Natixis)도 DEI 목표 달성 시점을 뒤로 미뤘다.
다만, 유럽에서는 이런 흐름을 강력히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영국 정부는 DEI 진전 속도가 더디다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영국 재무부는 3일(현지시각)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금융권 고위직 여성 비율이 2022년 34%, 2023년 35%, 2024년 36%로 매년 1%포인트씩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현재의 진전 속도로는 실질적 평등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까지 DEI 목표를 설정한 기업 중 44%는 목표 달성이 어렵거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보험사 아비바의 CEO 아만다 블랑은 보고서 발간 후 낸 성명에서 “이러한 속도는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업계가 선언적 약속을 넘어서 구체적이고 구조적인 조치를 취할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