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읽기】 EU 탄소 국경세 ‘한 방 정리’, 결국 자국산업 보호로 회귀

2021-03-12     박지영 editor

유럽의회가 10일 톤당 40유로(5만원)의 탄소 국경세를 부과하는 의회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번 의회보고서는 EU의 탄소 국경세가 '자국 보호주의'로 치달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그간의 논의 과정에서 '기후를 무기로 한 자국 산업보호'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EU가 마련했던 양보안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번 이슈를 문답으로 풀어본다. 

 

Q. EU의 철강, 화학 등 일부 산업에 무료로 온실가스 배출권을 부여하던 것을 없애고, 유료로 배출권을 할당하기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무료 배출권을 유지하기로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무료 배출권이란 뭔가? 

국내에서도 돈 내고 온실가스 배출권 구매해야 하는 업종을 정하는 것처럼, EU의 배출권 거래제도 유상할당 업종을 정하고 있다. 여기서 공짜로 배출권을 부과받는 업종이 있는데, 앞서 말한 철강, 화학 업종이 이에 해당한다. 이유는 ‘탄소 누출’ 때문이다. 탄소로 인한 재정적 부담이 커져 생산기지를 EU를 벗어난 역외로 옮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국의 산업이 밖으로 누출될 경우, 산업 자체가 붕괴돼 자체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고 일자리도 감소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배출권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다. 현재 항공사 등 269개 업종 중 175개 업종이 무상으로 배출권을 지급받고 있다. 

 

Q. 무료 배출권을 유지하는 것과, 탄소 국경세 사이 상관관계는 뭔가?

탄소 국경세 논의 초기만 해도 무료로 배출권을 주는 것을 폐지하려고 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보호주의’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다. 탄소 국경세 얘기가 나왔을 당시, 타 국가들의 반발이 아주 심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우 “탄소세는 자국(EU) 시장접근을 제한하려는 보호주의 조치”라며 EU가 세금 부과 계획을 강행할 경우 ‘외부적 대응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EU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 중 하나인 LNG를 공급해주는 주요 국가다. 탄소 국경세를 도입할 경우, LNG 조달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협박에 무상 할당 폐지는 좋은 명분이 됐다. 무상할당이 폐지되면 EU의 모든 기업들도 해외 기업과 똑같이 탄소 배출에 돈을 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른 국가에게 형평성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게 된다. "우리(EU)는 탄소 감축하려고 가격 경쟁력을 희생하면서까지 기업에게 탄소 감축을 강제하는데, 타 국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냐"고 되물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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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당위의 측면이다. 유럽 회계 감사원은 지난해 9월 “기업에게 배출권을 무료로 제공할 경우, 탈탄소 이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유럽의 강력한 기후 정책을 달성하기 위해선, 몇몇 업종에 무상할당을 하고 있는 현행 배출권 체계를 손봐 모든 업종이 배출권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논의는 꽤나 진전돼 EU는 무상할당을 줄이고, 탄소 국경세 도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마커스 베이어 비즈니스 유럽(한국의 전경련 같은 기관) 사무총장은 “무료 배출권을 유지하면서 탄소 국경세를 도입하는 건 유럽 기업들에게 ‘이중 이익’을 주는 셈”이라며 무상할당 비율을 줄이는 데 동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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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자국 기업에게는 배출권을 무료로 주고 타국 기업에게는 탄소 관세를 부과하는 행위가 WTO 금지하는 ‘이중 지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적 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WTO의 규정을 위반할 경우, 교역상대국과 법적 분쟁으로 비화 될 수 있기에, 자국 기업에도 탄소 배출권을 돈 주고 구매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EU에게 있어서 “무상할당 비율을 줄이고 탄소 국경세를 도입한다”는 전략은 명분과 당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었다.

 

Q. 이번 발표는 무엇을 뜻하나?

“무상할당 비율을 줄이고 탄소 국경세를 도입한다”에서 “무상할당 비율을 유지하고 탄소 국경세로 도입한다”로 바뀐 것이다. 결국 자국 산업에게 이익을 주면서, 타 국가에게는 탄소 값을 내라는, 자국 보호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유럽의회는 보고서 채택 하루 전 무료 할당제 병행 유지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알려졌다. 

급선회 결정은 철강, 화학업계의 집중 로비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철강, 화학업계는 줄곧 탄소 국경세 도입을 지지해왔다. 유럽 철강협회(Eurofer)는 “중국산 철강제품 수입으로 자국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며 철강 세이프가드(Safe guardㆍ긴급수입제한조치) 연장과 탄소 국경세 도입을 촉구해왔다. 악셀 에거트 유럽철강협회 사무총장은 “철강업계는 지금 고사 직전”이라며 “올해 안에 회복도 어렵고, 회복까지는 2년 넘게 걸린다”며 유럽의회에 탄소 국경세의 시급한 도입과 높은 관세를 요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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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결정으로 WTO의 분쟁을 의식한 유럽의회는 “WTO 협정 및 기타 무역협정에 위반되지 않도록 제도를 고안해 2023년부터 일부 산업에 탄소 국경세를 도입하는 등 단계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Q. 하루 전에 입장을 급선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년 탄소 국경세를 논의할 때만 해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러시아의 푸틴으로부터 가해진 어마어마한 압박이 있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자국의 탄소 국경세 도입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검토하고 있다. 

미국과 EU가 최근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끈끈한 협약을 다시 맺은 것도 EU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존 케리 미국 백악관 기후 특사는 10일 유럽을 방문해 “기후변화 대응에는 유럽과 미국의 공조가 중요하다”며 공동 대응을 강조했다.

최근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탄소 국경세를 사용한 것도 EU 입장에선 호재다. 룰 메이커인 미국이 탄소 국경세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탄소 국경세에 대항하고 있는 국가들의 불만이 잠재워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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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또한 올해 G7의 지도력으로 국경세 도입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설득해 빠른 시일 내 도입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WTO의 규제 또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만한 모멘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정치적인 힘이 움직이면서, EU에겐 가장 큰 난제였던 WTO가 해결될 여지가 보이자, 자국에게 유리한 배출권 무상할당을 유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복병이었던 중국과도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선 협력하는 모양새다. 작년 12월 30일 유럽과 중국이 7년간 진행해 온 포괄적 투자협정( Comprehensive Agreement on Investment, CAI)에 합의하면서, 높은 수준의 환경 및 노동 관련 규정 이행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중국도 암묵적으로 탄소 국경세에 동의하는 모양새가 갖춰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힘을 가진 국가들이 급속도로 EU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EU로서는 자국 산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상할당 비율을 낮출 필요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Q. 한국에 미칠 영향은?

그린피스와 EY한영회계법인의 조사에 따르면, EU와 미국, 중국이 탄소국경세를 도입하게 될 경우 한국이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이 2023년에는 6100억원, 2030년에는 1조8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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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요 수출 품목 전반에 추가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되며, 특히 철강과 석유화학 업계가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에 따라 12일 ‘제1차 통상법포럼’을 개최하고 탄소국경세에 통상법적으로 대응할 것을 시사했다. 환경부 한정애 장관은 “추후 배출권거래제를 이용해 탄소국경세를 도입하려는 EU를 상대로 협상력을 높일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가 탄소 국경세를 바라보는 온도 차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민주당 탄소중립특위 실행위원회 주최로 열린 ‘탄소국경조정제’ 관련 토론회에서 나온 각 부처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산업부 최진혁 통상정책총괄 과장은 “국제사회에서 탄소국경세는 WTO 원칙과 규범에 불합치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있다”며 “우리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고 우리 기업의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히며 좀 더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환경부 오일영 기후전략과장은 “탄소국경조정제도에 대한 WTO 합치 등 국제사회의 우려가 있음에도 탄소국경조정은 피할 수 없는 제도이자 예상 가능한 변수”라며 “탄소국경조정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할 것인지가 중요하며 탄소국경조정제도는 ‘2050 탄소 중립’ 목표 이행을 위한 부문별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며 선제적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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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탄소국경세 대응에서 난제는 국내 배출권 가격과 EU가 제시한 배출권 가격차가 크다는 점이다. EU가 10일 채택한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상품에 매길 관세를 자국의 탄소배출권 가격과 연동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EU와 최대 2배까지 차이가 나고 있다. EU는 톤당 40유로(5만원 선)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꾸준히 가격이 오르고 있다. 반면 한국은 평균 2만~3만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차이 나는 배출권 가격은 EU가 도입할 탄소국경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탄소국경세 도입시 교역국과 EU의 탄소 배출권을 비교해 가격체계가 동등하면 탄소국경세를 면제하고 낮으면 차액을 부과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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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은 탄소 관세까지 부담하면 이는 이중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전망이다. 더구나, 국내 탄소 배출권 거래제에 납부한 세금은 기술 개발 등에 투자돼 국내 기업에 환원될 수 있지만, 탄소 관세로 부담한 세금은 그대로 EU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EU는 탄소 국경세로 얻은 자금을 경제 회복 기금 상환에 사용키로 결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