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 모호하다” “자사 사업과 연관성이 낮다” “기관마다 ESG 평가방식이 상이하다”….
매출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털어놓은 ESG 전략 수립의 애로사항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 허창수)가 2일 발표한 ‘ESG 준비실태 및 인식조사’ 결과에는, 현재 국내 기업의 ESG 피로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우선, CEO들은 ESG에 관심이 높다. 10명 중 7명(66.3%)이 ‘매우 높다’(36.6%) 혹은 ‘다소 높다’(29.7%)라고 응답했다. 업종별로는 석유화학·제품, 철강, 반도체, 일반기계·선박, 디스플레이·무선통신기기, 건설, 숙박·음식업 등에서 관심이 높았다.
ESG 추진이 가장 시급한 기업군이 그대로 드러난다. 짧으면 10년, 길면 40년 내 탄소중립 시대를 예고한 세계 각국의 제조업 기반 대기업군은 모두 기후변화 ‘전환 리스크(transition risk)’에 처해있다. 석유화학기업의 경우 정유가 아닌 재생에너지로, 철강의 경우 수소환원제철로, 반도체 또한 니켈ㆍ구리ㆍ희토류 등 핵심광물자원의 고갈문제가, 선박 연료 또한 암모니아 등 친환경연료로의 전환 압박에 처해있다. ESG 중에서는 특히 E(환경)에 관한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CEO들은 직감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ESG는 정말 모호한 개념일까
ESG 경영의 구체적인 연간목표 수립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31.7%가 '수립했다', 39.6%는 '수립계획이 있다'고 응답했다. 10곳 중 7곳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거나 할 예정이다.
관련 경영전략 수립에 있어 애로요인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29.7%가 'ESG의 모호한 범위와 개념'을 꼽았다. 기타 애로요인으로는 자사 사업과 낮은 연관성(19.8%), 기관마다 상이한 ESG 평가방식(17.8%), 추가비용 초래(17.8%), 지나치게 빠른 ESG 규제도입 속도(11.9%) 등이 지적됐다.
이 응답을 보면, 현재 국내 CEO들의 ESG 인식도가 높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각 평가기관별 ESG 평가항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ESG 개념이 그다지 모호하지 않다. 예를 들어 환경이라면 해당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 상태가 어떤지, 향후 리스크가 높은지, 사회라면 건강한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는지, 지배구조라면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주주들의 권리가 잘 보장되는지 등을 알 수 있다. 평가를 아예 받지 않거나 외부에 드러난 ESG데이터가 제대로 없다면, 외부 이해관계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하는 기업임을 투자자는 금방 파악할 수 있다.
평가기관별 평가방식이 다른 문제는 현재 수많은 기업이 지적하는 이슈다. “신뢰도가 높은 평가기관만 몇 곳 선정해 대응한다”(A기업) “평가기관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가 다르기 때문에, 각 평가기관별 점수 차이를 감안해 반영한다”(B투자기관) “앞으로 ESG 평가에 관한 국제 기준이 만들어지면, ESG도 재무지표나 신용평가처럼 기관별 격차가 지금처럼 크게 나진 않을 것”(C컨설팅기관) 등등 현재 상황에도 빠르게 대응하는 기업은 존재한다.
ESG를 “자사 사업과 연관성이 낮다”고 평가하기엔 글로벌 투자자와 정부당국, 소비자, 직원들의 변화 흐름이 너무 거세다. 물론 추가비용이 발생하고, 급격하게 ESG 규제가 도입되는 등의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국내의 경우 ESG 빅뱅이 1년도 되지 않아 관련 정부기관과 국회까지 나서서 ESG 깃발을 휘두르고 있어, “ESG 평가점수를 잣대로 또 어떤 규제가 쏟아질까” 걱정하는 기업들이 많다. 중기부에서 벤처기업 창업 지원하듯, 정부당국은 기업이 ESG 대응을 잘 할 수 있게끔 판을 깔아줘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SG위원회·전담조직의 의미는?
이사회 내 ‘ESG 위원회’ 설치 여부에 대해서는 45.5%가 설치(17.8%)했거나 할 예정(27.7%)이라고 답했다. 위원회 구성원의 경력은 전직 기업인(24.1%), 회계 전문가(20.7%), 교수(13.8%), 전직 관료(6.9%) 순이었다. 별도 ESG 전담조직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응답기업의 절반가량인 53.5%가 이미 마련(23.8%)했거나 마련할 계획이 있다(29.7%)고 답했다. 다만 관련 전문인력 채용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8.9%만 채용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먼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사회 내 ‘ESG 위원회’ 설치가 준비된 기업이 국내에 많을까? ESG위원회에는 무슨 안건이 올라가며, 어떤 의사결정이 내려질까? ESG 전략과 로드맵이 존재하는 기업, 즉 ESG 추진체계가 있는 기업만이 ESG위원회를 통한 유기적인 협업이 가능하다. “다른 데서 다 만드니까 우리도 만들자” “일단 만들어 놓고 홍보하고 나면, 어떻게든 운영은 된다”라는 생각이라면? ESG 유행에 떠밀려 ‘ESG위원회’를 만들어놓고 난 후, 향후 1년 내에 “ESG 위원회, 있으나 마나”라는 기사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기업은 향후 ESG위원회와 전담조직의 운영 및 성과를 어떻게 담보할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ESG 필요 이유?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최근 “ESG는 규제가 아니라 기업에 새로운 기회”라고 말한 바 있지만, 국내기업 CEO들은 아직까지 ESG를 리스크로 보고 있다. ESG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기업이미지 제고’와 ‘ESG 규제부담’이라는 응답이 60%가 넘기 때문이다.
ESG가 필요한 이유로는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많았다. 세부적으로는 '기업 이미지 제고 목적' 43.2%, '국내외 수익에 직결되기 때문' 20.8%, 'ESG 규제부담 때문' 18.0%, '투자자 관리(개인‧기관)를 위해' 15.3% 순이었다.
ESG에 따른 매출액 증감 전망치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차이 없다'는 응답이 33.7%, '0~5% 증가'(25.7%), '5%~10% 증가'(17.9%) 순으로 응답했다. 기업 10곳 중 4곳 가량은 10% 이내의 매출 증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았다.
지속가능기업 1, 2위로 선정된 ‘슈나이더 일렉트릭’과 ‘오스테드’의 공통점을 보면, 시대변화에 따른 과감한 업종 전환과 10년 넘은 장기투자에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만 봐도 마찬가지다. “ESG 잘하면 외부로부터 기업 평판이 좋아진다”는 건 ESG경영의 결과 중 하나일 뿐, ESG는 결국 기업 내부의 체질 전환을 통해 “건강하고 오래 가는 기업”을 만드는 수단이다. ESG의 또다른 이름은 ‘지속가능경영’이다. ESG로 얻는 내부 편익이 훨씬 크다는 걸 CEO가 인식하지 않으면, ESG는 또 하나의 사회공헌이나 CSV유행 물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회(Social) 분야 활동의 주요 대상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소비자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항목별 응답 순서는 소비자(31.7%), 지역사회(19.8%), 근로자(18.8%), 협력사·경쟁사(16.8%), 일반국민(12.9%) 순이었다.
2050 탄소중립 준비 24.8%만 ‘잘 돼간다’
환경 부문의 주요 관심분야는 환경 친화적 생산(26.7%), 기후변화 대응(25.7%), 환경 리스크 관리(21.8%), 환경 친화적 공급망 관리 (16.8%) 순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과 관련한 준비 정도를 묻는 질문에는 보통이다(37.6%), 비교적 잘 준비됐다(21.8%), 잘 모르겠다(17.8%), 미흡하다(12.9%), 매우 미흡하다(6.9%), 매우 잘 준비됐다(3.0%) 순으로 응답했다.
탄소중립 준비 사업으로는 대기오염물질 저감설비 및 관리시스템 개발(31.7%), 재생에너지 전환 투자(15.8%),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을 위한 연료전환(12.9%), 전기배터리 소재 투자(7.9%) 등을 꼽았다.
SK건설이 지난해 1조원을 주고 EMC홀딩스라는 폐기물처리업체를 인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EMC홀딩스는 하폐수부터 폐기물 처리, 소각, 매립 등을 아우르는 환경기업이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고 CNN에 까지 보도된 경북 의성의 쓰레기산이 문제된 이유는 무엇일까? 쓰레기 해외 수출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수입하던 개도국에서 더이상 쓰레기를 받지도 않고 해양 매립까지 금지되자, 국내 산지에 불법으로 버려진 쓰레기산만 어마어마하다. 이미 산업폐기물 처리비용 단가가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환경과 기후변화, 탄소중립 이슈는 '미루면 미룰수록' 더 부담이 돌아오게 돼있다. 로레알이 종이튜브형 화장품 용기를 만들고, 맥도널드가 빨대를 없애고, 레고가 플라스틱 레고를 없애는 게 '착한 친환경 기업'이어서가 아니다. 환경 규제가 높아지고, 규제로 인한 부담금은 결국 기업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