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와 기후 위기가 원자력 에너지의 부흥을 빠르게 견인하고 있다. 

21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 의장국 벨기에는 브뤼셀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함께 '원자력 정상회의(Nuclear Energy Summit)'를 개최했다. EU에서 원자력 관련 정상급 회의는 이번이 처음이다.  

AP 통신 등 외신은  과거 부정적이었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 최근 몇 년 사이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로 인해 역전되었다고 보도했다.  

 

"우리는 원자력이 필요하다"... EU, 원자력 부활시킨다   

이번 원자력 정상회의에 앞서 벨기에 총리 알렉산더 드 크루(Alexander De Croo)는 “우리는 원자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탄소중립과 지정학적 위기로 인한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는 EU의 보수적인 원자력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벨기에는 2025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폐쇄한다는 계획을 취소, 원자로 두 개의 수명을 10년 연장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정상회의에 참석한 미국, 중국 등 30여 개국은 공동성명에서 ”기존 원자로의 수명 연장을 지원하고 경쟁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원자력 에너지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명서 주요 내용으로는 안전과 보안을 유지한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자로의 조기 배치 등이 포함됐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언(Ursula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은 연설에서 “원전의 안전한 가동 연장은 청정에너지원의 대규모 확보를 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며 넷제로 사회를 위해서는 원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 피터 비롤(Fatih Birol) 또한 기후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현재 전 세계 전력 생산량의 10% 미만에 불과한 원자력 발전 용량 확대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풍력, 수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 의존도가 높은데, 기후나 지리적 문제로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낮은 국가들도 있다는 이유다. 

한편 이번 회의는 원자 핵분열을 형상화한 102m 높이 조형물 ‘아토미움(Atomium)’ 근처에서 열렸다. 아토미움은 1958년 브뤼셀 만국박람회 때 지어진 랜드마크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염원하는 상징물이다.

한국에서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석했다. 

ABC 뉴스 등 외신은 이번 회의에서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은 위험성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EU에서 원자력 관련 정상급 회의가 개최됐다. / 픽사베이
EU에서 원자력 관련 정상급 회의가 개최됐다. / 픽사베이

 

EU, 원자력 경쟁력 낮아져... 인력 확보, 투자 유치 어려워

프랑스 등 EU 친(親)원전 국가들,  '원자력 동맹' 맺고 규제 완화 추진

한편 유럽 현지에서는 원자력 부흥 추진이 너무 늦은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로 에너지 안보 및 청정에너지 수요는 높아졌는데, 그간 보수적인 규제로 인해 EU의 원자력 역량은 크게 저하됐기 때문이다.

피터 비롤 사무국장은 “확실히 늦은 측면이 있다. 특히 유럽의 원자력 발전이 이렇게 축소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은 23개의 원자로를 건설 중인 반면, EU가 건설 중인 신규 원전은 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 각각 1기씩 총 2기다. 과거 EU 원전 선도국가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단계적 탈원전’을 선언하고 2023년 마지막 남은 원전 3기까지 가동을 중단, 완전한 탈원전 국가가 됐다.

블룸버그는 EU 15개 회원국이 SMR 개발을 추진 중이지만 대량 생산 시스템 구축까지는 최소 1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인해 프로젝트 비용이 늘어난 데다가 투자자들이 SMR 기술의 실현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원전의 유지보수에도 비용이 필요하다. 유럽 원자력 산업 무역 협회 뉴클리어유럽(Nuclear Europe) 사무국장 이브 데스바제유(Yves Desbazeille)는 노후 원자로를 교체하는데 필요한 투자는 “놀라울 정도”라며 원자력 부흥에는 “하나의 장벽이 아닌 여러 개의 장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력 및 자원도 부족하다. 유럽 원자력 발전을 이끌었던 핵 과학자들은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뒤를 이을 신규 인력이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원자력 산업 지원을 위한 EU 공동 연구센터의 예산은 20%나 삭감된 상황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재정과 투자자 발굴 문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프랑스의 신규 원자로 평균 자본 비용은 1메가와트당 900만달러(약 120억원)로 중국의 3배 수준이다. 중국과의 투자 유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이에 프랑스를 필두로 폴란드, 불가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등 12개 EU 국가로 구성된 원자력 동맹은 원자력 확대를 EU 차원의 프레임워크로 진행해야 한다며 금융 정책을  포함한 각종 관련 정책에서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취급해 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원전 반대 진영의 13개 회원국은 자금 지원은 현재 공동의 목표인 재생에너지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4일(현지시각) 양 진영은 EU 회원국 에너지 장관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 원전에 대한 EU 내 갈등을 표출한 바 있다. 

한편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는 회의장 밖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너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며 재생에너지가 훨씬 더 실효성이 있다고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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