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백악관에서 IT 전자기기에 대한 소비자 수리권을 인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효하면서, 애플과 MS 등이 타격을 입게 될지 주목받고 있다.
미 백악관에서 IT 전자기기에 대한 소비자 수리권을 인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효하면서, 애플과 MS 등이 타격을 입게 될지 주목받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통과된 ‘행정명령’에서 이목을 끈 것은 ‘소비자 수리권(right to repair)’ 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독점 조치를 없애고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기술, 의약품, 농업 등 3개 산업분야의 72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수리권이 포함됐다.

빅테크 IT제조기업을 겨냥한 것이다. 애플, MS 등 IT제조업체들이 그동안 자사 제품을 수리할 때 직접 운영하는 공식 수리점만을 이용하도록 하는 관행을 유지해왔다. 소비자들이 직접 기기를 뜯어 수리하거나 일반 수리업체를 이용하면 보증 수리를 해주지 않거나, 일반 수리업체에는 정품 부품을 제공하는 않는 등의 불이익을 줬는데, 미 백악관은 이런 관행을 없애겠다고 한 것이다.  
 

미 반독점 규제하는 FTC(연방무역위원회),

"소비자 수리권 제한하는 제조업체 정당성 근거 부족하다"

이번 행정명령은 독립(제3자) 수리점을 이용하거나, 자신이 직접 기기와 장비를 DIY로 수리하는 것을 반경쟁적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철폐할 것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촉구하고 있다.

미국 내 반응은 긍정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소비자 수리권은 수년 동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여겨져 왔다”며 “애플은 독립수리점의 아이폰 수리를 허용하지 않으며, 니콘은 지역 카메라숍에 부품 판매를 중단해 많은 수리업체가 폐업할 수밖에 없었으며, 존 디어 트랙터는 농부들이 가장 기본적인 수리를 할 때에도 대리점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소비자 수리권이 본격적으로 이슈가 된 것은 2012년 메사추세츠주에서 주민투표로 ‘자동차 소비자 수리권’이 통과되고 2013년 법률에서 규정되면서부터다. 이 경쟁은 전국적으로 독립된 정비기관들이 자동차 수리를 가능하도록 하고, 자동차 보험료율 및 수리가격을 합리적으로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IT기업들은 제조사의 지적재산권 보호와 제품의 안전한 사용 등을 이유로 점점 ‘애프터서비스 시장’을 독점해 나갔다. 병원의 인공호흡기 같은 장치까지도 이와 같은 독점적 서비스가 되면서, 펜데믹 전염병 기간 동안 이 같은 이슈는 큰 논쟁이 되기도 했다.

소비자단체들의 압박도 거세지면서, 미국에서만 27개주에서 수리권 관련 법안이 논의돼 왔다. 하지만 애플과 테슬라 등 테크 기업들의 로비도 만만치 않았다.

FT 보도에 따르면,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5월 초에 미국에서 반독점 규제를 담당하는 연방무역위원회(FTC)가 발표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소비자 수리권을 제한하는데 대한 제조업체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수리권 문제에 대한 규제와 법 집행의 재활성화를 검토해야 하다”고 밝혔다. 

 

ESG 행동주의 투자자 애즈유소우, 

MS 주총서 "소비자 수리권 보장 촉구" 주주결의안 제출

MS에서는 주주총회에서 '소비자 수리권'과 관련된 주주 결의안이 사상 최초로 등장했다./MS 홈페이지
MS에서는 주주총회에서 '소비자 수리권'과 관련된 주주 결의안이 사상 최초로 등장했다./MS 홈페이지

 

심지어 기업에 ‘수리권’과 관련된 주주 결의안까지 등장했다. 지난 6월 24일(현지시각), ESG 행동주의 투자자그룹인 비영리단체 ‘애즈유소우(As You Sow)’는 MS에 소비자에게 전자제품 수리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주주 결의안을 제출했다.

애즈유소우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MS는 전자제품을 보다 쉽게 수리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적, 사회적 편익을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자제품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폐기물 중 하나이며, 개인용 컴퓨터와 관련된 폐기물의 70%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다. 수리를 통해 제품기기의 수명을 연장하면 업스트림(광물 채굴 과정의 유해물질 및 온실가스 배출)과 다운스트림(매립지 오염)의 환경 오염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즈유소우측은 “프랑스는 최근 판매 단계에서 모든 전자기기에 대한 ‘수리가능성 점수’를 공표하도록 요구하는 법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며 “MS는 경쟁사인 델, HP에 비해 수리가능성 점수가 저조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더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에선 최근 IT제조회사들이 전자제품 수리 정보, 부품 및 도구를 중소기업과 소비자들이 쉽게 이용하도록 요구하는 연방법안까지 제출돼 있다. 애즈유소우는 “MS는 지난 몇 년 동안 수십 건의 유사한 법안이 제출될 때마다 적극적으로 반대해왔다”며 “MS가 2030년까지 탄소 네거티브가 되겠다는 약속을 진정성 있게 추진하려면, 소비자들이 새 전자기기를 사는 것보다 수리하는 것이 더 쉽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U, 지난 3월 세탁기와 냉장고, TV 등 전자제품 10년 부품 단종 못해 

유럽은 미국보다 진도가 더 빠르다. 이미 지난 3월 EU에서는 세탁기와 냉장고, TV를 10년 이상 쓸 수 있도록 하는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시행됐다.

EU는 제조사들에게 부품을 쉽게 단종하지 못하도록 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부품이 단종되지 않도록 관리할 의무를 지도록 하고, 10년간 수리 매뉴얼도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했다. 부품 확보를 못해 고장 난 제품을 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미다. EU는 올해 안으로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 등 IT기기까지 이 법을 확대 적용할 방침이다.

수리권을 추진하는 미국, 유럽, 영국, 독일 등 4국 단체들은 매년 10월 세번째 토요일에 ‘국제 리페어 데이(International Repair Day)’로 기념하고, 올해도 전 세계 50여개 도시에서 수리권을 요구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다.

유럽환경청(EEB)에 따르면, 유럽 내에서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 수명을 1년 연장하면 약 400만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과 같다. 유럽의 경우 전자제품 평균수명을 보면, 스마트폰 3년, 노트북은 4.5년, 진공청소기는 6.5년이다(2019년 기준).

아직 국내에선 수리권에 대한 논의가 없지만, 이런 흐름이 국내에 도입될 경우 삼성전자, LG전자 등 제조업체들의 부담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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