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은 ‘ESG 경영’을 강화하는 활동으로 둔갑했다. 사회공헌에서 CSR로, CSR에서 CSV로, CSV에서 ESG로 용어만 갈음하고 있는 것이다. 트렌드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는 우리나라에서, 어김없이 ESG는 원치 않던 워싱을 당하고 있다. 

SK텔레콤 서진석 팀장은 2005년부터 이 모든 변화 과정을 지켜봐왔다. 변해야 할 기업은 변하지 않고 정작 용어만 바뀌는 현상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왔을 터다. “대중의 인식이 가끔 사회의 방향을 잘못 끌고 가기도 한다”며 가끔 회의감도 느꼈던 그가 ‘그럼에도’ 이 판을 못 떠나는 이유는 그만의 전장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영상: Beyond ESG

Q. 신간 ‘행동주의 기업’.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책을 쓰게 된 배경과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전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CSR 업무를 맡으며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내 전장의 이름은 ‘beyond CSR'이다. 나름 세 군데에서 전단(戰端)을 만들고 싶었다. 

첫째.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CSR의 대표 사례가 잘못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로 사회공헌을 통해 CSR을 실천하고자 하거나, CSV, 지속가능성 등을 얘기하면서 사회, 환경적 폐해를 일부 영역에서 줄이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얘기하는 경우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TV 캠페인과 연계된 몇몇 대표 사례가 있고, 많은 기업들이 그렇게 일반인의 인식에 남을 수 있는 사례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는 신기루에 가까우며, 그렇기에 그 길로 들어서서는 곧 막다른 길에 닿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싶었다.

둘째는 CSR의 북극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파타고니아이며, 좀 더 확대하면 '행동주의 기업'에 소개한 기업들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변방이나 비주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여러 곳에서 파타고니아 사례를 소개하면, 우리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려 무력감을 느낀다고 많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현재 더욱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셋째는 자본주의 기관차 선두에 서서 동력을 만들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인디언 속담에 첫 번째 늑대(평화와 사랑)와 두 번째 늑대(공포와 탐욕)가 싸울 때, 누가 이기느냐는 이야기가 있다. 답은 “내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다”다. 자본주의라는 기관차가 먹이로 고객의 편의와 경제적 가치만을 취한다면, 사회적 가치는 백전백패 할 것이다. 

이번 ‘행동주의 기업’은 두 번째 고민에서 비롯한 책이다. CSR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비즈니스 밸류 체인 전반에 걸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영역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기업을 찾아 그들의 고민을 제시하면 길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동주의 기업이라는 단어는, 아주 구체적으로 정의되진 않았지만 21세기 들어서 몇몇 기업들이 그런 용어를 쓰고 있었다. 이 생소한 개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외부 환경’이다. 지금만 생각해도 사회·환경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해 지구 온도를 1.5도 낮추자고 주창하지만 1.1도가 높아졌다. 불평등 위기도 심각하다. 20세기 초반의 불평등을 넘어서는 1대 99의 사회가 됐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외부 환경이 생긴거다. 두 번째로는 ‘내부적 요인’이다. 기업 스스로 자신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외부 환경의 문제를 가속화하는 건 아닌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어떻게 비즈니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글로벌 기후 파업, 인종차별(Black lives matter)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기업이 자신의 경영 울타리를 넘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시도가 많았다.

 

Q. 행동주의 기업의 모든 사례가 글로벌 기업이라 아쉬운 점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행동주의에 한참 못 미치는 행보도 망설이는 기업이 많다. 해외 기업과 국내 기업의 간극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국내에서 CSR은 사회공헌 측면으로 협소하게 고려돼 왔다. 아직 '사회참여'라고 하면 자원봉사, 그저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거다. 이런 참여는 타의 규범을 앞서 나가는 참여가 아닌, 어떤 사회의 문제에 동참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서구 기업, 특히 유럽 기업은 타의 규범을 앞서는 ‘혁신가’들이 있었다.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상정해보자. 사회 규범이 보통이고, 관련된 법과 규율로 해결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이를 통해 해결되진 않는다. 유럽 기업은 사회에 앞서 먼저 문제제기를 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를 플랫폼 삼아 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유기농면을 써야 한다는 법적, 사회적 인식조차 없었던 1994년 유기농 면을 처음으로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파타고니아가 그 예다.

국내 기업은 경험도 부족했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도 소극적이었다. 오랜 기간 사회적 참여를 대중들의 인식을 얻기 위한, 즉 PR 중심적 사고로 바라봐 온 탓도 크다.

관점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CSV 열풍이 불었을 때다. 비즈니스를 건드린 CSV는 이전과는 달랐지만, 사례 중심으로 풀렸다는 한계를 가져왔다.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깊게 하지 못한 거다. 비즈니스 통해 어떤 일반적인 사회 규범을 넘어서는 목적을 제기하면서 미래의 사회적 가치를 고민해보는, 이른바 축적의 시간이 부재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Q. 행동주의 기업은 비즈니스를 그저 ‘플랫폼’이라고 칭한다. 사회 변화의 동력이 비즈니스지, 비즈니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책에 소개된 기업들은 어떤 철학을 가졌기에 우리로선 기업의 책무를 벗어나는 일까지 한 걸까.

 

 

책에 소개된 기업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파타고니아는 1973년에 만들어졌지만 1991년 미션을 처음 만들기 전(우리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되 불필요한 환경 피해를 유발하지 않으며, 환경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해결 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사업을 이용한다)까지는 자신의 비즈니스가 어떤 환경적 폐해를 만들어내는지조차도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환경운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적 발전을 실현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자신이 사회 문제를 만드는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거다.

변화는 1991년부터 시작됐다. 자신의 비즈니스가 환경적 폐해를, 사회에 미치는 마이너스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목화 농장에서 상당한 양의 살충제 농약을 살포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마이너스 환경적 영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쓰레기 줄이기, 유독성 물질 배출 줄이기 등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파타고니아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2010년도에 들어와서는 마이너스를 줄여 나가는 게 아니라 플러스 가치를 창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만큼 환경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것들을 자각하고 기존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점차 자신의 미션을 날카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닥터 브로너스의 기업 목표.
닥터 브로너스의 기업 목표.

바디샵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에 만들어졌지만 기업의 부정적 영향을 자각한 때는 1984년 이후다. 닥터 브로너스도 1940년대에 만들어졌지만 행동주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도 이후다. 자신이 문제 유발자라는 자성, 심각해진 외부요인이 맞물리며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ESG, CSV, CSR 모두 출발점 달라

어떤 개념의 시대로 명명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지평을 넓혀줘야

Q. 행동주의 기업이 주는 시사점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ESG가 빠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국내에서는 일반 사회공헌 활동을 CSR로, CSV로, 지금은 ESG로 워싱하고 있다. 이 현상, 어떻게 보고 있는지.

두 가지 워싱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작은 것을 가지고 크다고 얘기하는 거다. 기업이 만드는 사회적 가치 중에서 사회공헌의 비중은 1%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공헌을 열심히 하면서 CSR을 잘하고 있다는 얘기는,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얘기하는 워싱인거다. 또 하나의 워싱은 기업이 만드는 가치를 얘기할 때 기업이 창출하는 가치는 얘기하지만 훼손하는 가치는 얘기하지 않을 때다.

반면 ESG는 아직 워싱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ESG가 활성화된 단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ESG 열풍에 대해서는 상당히 반기고 있다. 기본적으로 ESG는 사회, 환경 정보를 관리하고 측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되는데, 이 자체가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본다. ESG만 잘하면 워싱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ESG는 ‘기본’이다.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해오지 않았던 부분이다. 또 투자자 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몇몇 한계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투자자 관점에서는 해당 기업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기를 원한다. 모든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ESG에는 중대성 평가가 들어간다. 하지만 중대성 평가를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기후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기업, 제약회사나 은행에게 환경에 대한 노력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준은 투자자에 비해 높아졌다. 투자자들은 공급망 이슈에서 원재료 단계까지 책임지길 원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네슬레나 유니레버가 인도네시아 오랑우탄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미 항의하고 있는거다.

개념을 갈아타는 현상도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 지속가능경영, CSR, CSV, ESG 모두 탄생 배경과 강조점은 다르다. 하지만 지향점은 일치되고 있다.지속가능경영은 환경에서 왔지만 CSR이 이해관계자에 환경을 고려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줬고, CSV는 비즈니스 부서를 움직이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ESG 역시 지배구조, 데이터 관리, 투명한 정보공개에 상당한 강점이 있다.

용어에 대한 패러다임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SG가 등장하면서 CSR을 비판하거나 CSV가 등장하면서 CSR을 비판할 때 대개 보면 CSR이라는 개념을 어떤 정형화되고 고정된, 과거에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CSR 자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개념 각각의 한계를 극복해 가면서 논의의 지평을 확대해가는 형태로 나가야지, 헤게모니 싸움만 한다면 우리 사회를 역행시킬 수 있다.

 

Q. 서로 보완하며 발전해 나가는 관계, 사실 ESG는 비즈니스에 각각의 요소를 넣어서 경영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행동주의 기업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 지향점이 다르다고 보이는데, 행동주의 기업이 ESG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면.

 

 

행동주의 기업은 아이러니하게도 ESG 우수기업이 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파타고니아 같은 경우에는 트럼프 정부와 마찰이 있었고, 러쉬도 크게 민감한 이슈인 성소수자 문제를 자신들의 가치로 받아들인다. 가족회사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과감하게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건데, 투자자 관점에서는 굉장히 큰 리스크인 거다. ESG 기준을 적용하면 마치 낭중지추처럼 튀어나온다.

기후변화를 예로 들면, 두 주체의 대응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ESG 기준만 준수하는 기업은 탄소 감축에 초점을 맞추지만, 행동주의 기업은 복원에 초점을 맞추는 거다. 시선은 높게 둬야 한다. ESG라는 기본을 튼튼하게 만든다면, 이를 발판 삼아 도약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ESG 시대에 ESG 책을 내지 않고 행동주의 기업을 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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