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투자자 의결권의 중요성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의결권은 매우 강력한 도구다. 최고 경영진의 선임과 해임을 결정할 수 있고, 합병, 분할 등 굵직한 기업 활동을 최종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의결권이다. 그런 면에서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서 블랙록 등 미국 대형 패시브 운용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바로 ‘패스쓰루 보팅(pass-through voting)’ 이다. 투자자들은 보통 자신의 돈을 전문가, 즉 자산운용사에게 맡기면서 의결권도 같이 맡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펀드에 가입하고 그 펀드가 어떤 기업에 투자했다면, 그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돈을 맡긴 투자자가 아니라 그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가 된다. 그런데 패스쓰루 보팅은 말 그대로 의결권이 자산운용사를 통과(pass through) 하여 최종 투자자가 직접 행사하는 제도다.
Anti-ESG 와 Pro-ESG 사이에서
패스쓰루 보팅은 독일의 DWS 자산운용이 2021년 최초로 도입했으나, 블랙록 등 미국 대형 패시브 운용사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블랙록이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2022년 미국에서 공화당을 중심으로 안티ESG의 불이 거세지면서 ESG와 기후변화에 목소리를 높이던 블랙록이 주요 타겟이 되었다. 안티ESG진영은 블랙록이 대규모 자금을 이용해 기업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으로는 유럽의 연기금을 중심으로 운용사들이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 충분히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2021년 이후 블랙록이나 뱅가드 등의 기후변화 주주제안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유럽 연기금들의 불만이 커졌다. 당시 네덜란드 연기금 PGGM 은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ESG를 한다고 비난하고, 한쪽에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최선은 방법은 ‘각 투자자들이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
어떻게 작동하는가?
예컨대, 어느 펀드에 가입한 고객 A는 모든 안건에 대해 수익성을 우선시하고 비용이 늘어나는 경우에는 반대하고 싶어한다. 반면 B는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업가치에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경우 A는 ‘수익성 우선 정책’을 선택하고, B는 ‘기후 친화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특정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정책, 노동 친화적 정책 등 다양한 정책이 제공된다.
고객별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선택했다면 각 고객이 회사에 보유한 지분이 얼마인지 계산한다. 고객은 회사에 직접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펀드를 통해 간접 보유한 것이므로, 펀드에 가입한 금액을 토대로 별도 계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따른 지분율만큼 일부는 찬성, 일부는 반대로 의결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투자자가 펀드에 포함된 수십개, 수백개의 기업에 의결권을 일일이 행사할 수는 없다. 따라서 투자자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의결권 행사 정책을 선택하고, 각 안건별로 그 정책에 부합하게 의결권이 행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패스쓰루 보팅이 가능하려면 다양한 의결권 행사 정책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의결권 자문기구와 자산운용사, 그리고 수많은 고객의 의결권을 펀드 보유 비율에 따라 개별적으로 행사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개인 맞춤형 의결권
패스쓰루 보팅의 시작은 주로 연기금 등과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를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개인투자자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블랙록은 2024년 S&P 500 ETF에 개인투자자도 참여시키는 파일럿을 실시했고, 뱅가드는 그보다 1년 앞서 ‘투자자의 선택(Investor Choice)’ 이라는 개인투자자 대상 제도를 시범 도입했다. 아직 모든 펀드는 아니고 현재 전체 AUM의 약 10%에 해당하는 1조달러(약 1470조원) 정도에 해당하는 펀드만 대상으로 한다.
뱅가드가 최근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개인투자자 대상 프로그램이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인다. ‘25년 참여 고객의 수가 전년 대비 2배 늘어서 8만명을 넘어섰다.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정책의 비중이 35%에 그쳐 고객들이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골고루 선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SG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결과도 나왔는데, 성별과 나이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체 고객 중 ESG정책을 선택한 비중은 17.6% 인데, 44세 이하의 고객은 42%가, 또 여성인 고객은 28%가 ESG정책을 선택했다. 즉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ESG정책을 선택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ESG정책의 선택 비중이 낮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뱅가드의 총 AUM이 10조달러(약 1경4720조원)임을 고려할 때 이 프로그램이 전체로 확산되는 경우 뱅가드에서만 거의 2조달러(약 2943조원)가 ESG 친화적으로 투표를 하게 되는 셈이다. 어린 세대일수록 ES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경향을 고려할 때 부가 상속되면서 ESG친화적인 정책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패스쓰루 보팅이 던지는 질문들
영국에서 패스쓰루 보팅에 참여하기 시작한 한 기관투자자는 “우리가 가진 한 목소리를 시장에서 제대로 내기 위함” 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결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투자자의 가치관이 다양화되면서 의결권의 소유 주체와 행사 주체의 괴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마냥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진 않을 것이다. 투표권이 여러 이해관계자에게 분산되면 한 기관이 일관되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스튜어드십 활동의 일관성과 영향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개별 투자자의 정책 선택은 정보 수준이나 전문성의 차이에 따라 편향될 위험이 있어,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를 저해할 우려도 제기될 수 있다. 학계에서도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이 혼재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해결해야할 과제도 많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이 새로운 시도는 수탁자로서 기관투자자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자본시장에서 궁극적 소유자인 최종 투자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질 것이다.
☞ 박세원 팀장은
박세원 팀장은 국내 ESG리서치 기관에서 ESG리서치 및 의결권행사 등의 업무를 수행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5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종합자산운용사인 키움투자자산운용에서 ESG전담부서를 맡아 ESG 투자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자체적인 ESG평가 모형을 비롯한 ESG리서치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운용부서와 협력하여 ESG요소를 투자 프로세스에 통합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