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좋은 소식은 성급하게 알리고 나쁜 소식은 감추려고 하는 본성이 있는데, 회계는 정반대로 좋은 소식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나쁜 소식은 즉시 인식하라고 명령해 인간 본성의 허물을 교정하는 장치입니다.”

지난 3월30일 한국타이어의 지주회사인 한국앤컴퍼니의 감사위원(사외이사)으로 선임된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가 2018년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글이다. 회계의 본질을 너무도 잘 표현한 이 문장이 회계학 교과서에 나오는지, 본인의 통찰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과 관련, 증권선물위원회 감리위원으로서 ‘회계부정’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언급한 이 문장은 당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정치적으로 편향된 포스팅이 잦아 우려되기도 하지만,  그는 ‘갓뚜기’라 불리는 오뚜기 신화에 가려진 지배구조 상의 문제점을 페이스북 가상 대화체로 풍자하기도 했고,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초청 강연에 가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겨냥해 "기업 경영에서 물러나 대주주로서 이사회 의장에만 전념하는 게 좋겠다"는 돌직구를 날린 재기발랄한 기업 거버넌스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한상 교수는 이번 주총에서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의 장남 조현식 부회장과 차남 조현범 사장의 경영권 분쟁 와중에 조현식 부회장의 추천과 국민연금, 소수주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지난해 상법개정으로 도입된 ‘감사위원 분리 선출’ 제도에 힘입어 최대주주를 꺾고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타이어그룹의 주총은 금호석유화학과 함께 경영권 분쟁으로 촉발된 표 대결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올해 주총 시즌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런데 금호석유화학은 말 그대로 재벌가의 삼촌-조카 간의 전형적인 경영권 분쟁이었다면, 한국앤컴퍼니는 표면적으로는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이지만, 대기업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소수주주’를 등에 업은 사외이사가 선임됨으로써 장차 우리나라 기업 지배구조 상의 중대한 변화를 촉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3%룰 적용, 소수주주 등에 업은 사외이사 첫 등장

"ESG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블로그 'Balanced CSR'을 운영하는 유승권 이사는 “ESG는 세발자전거와 같다. 앞바퀴인 G가 뒷바퀴인 E와 S를 잘 이끌어가는 구조이다. 뒷바퀴인 E와 S중에 하나만 망가지거나 기울어도 앞으로 가기 어렵다”고 답한다. 그야말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그러면서 “G의 문제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어쩌면 한국 기업들이 더 나은 경영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개선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G의 문제”라고 덧붙인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에서는 주주들이 이사회를 통해 경영자를 감시하는 지배구조가 정착된 반면, 오너 경영이 일반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이사회가 유명무실했다. IMF 이후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사회보다는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나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제한적이나마 오너 경영의 전횡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떠맡는 정도였다. 

2017년부터 연기금이나 투자기관들이 앞다투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는가 하면, 국내에도 다수의 행동주의펀드까지 생겨나 이젠 주주총회에서 지배주주가 추천한 사외이사에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행동주의펀드를 중심으로 소수주주들이 결집해 대주주와 표 대결을 펼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상법 개정안의 ‘감사위원 분리 선출’에 따라 지배주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 선임의 길이 열렸다. 기존에는 모든 이사를 일괄 선출하고, 이들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출하다 보니 지배주주의 의결권 3% 제한규정이 실효성이 없었고, 결국 지배주주가 추천한 이사들 중에서 감사위원이 선임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개정안에는 최소 1명 이상의 감사위원은 다른 사외이사와 분리 선출토록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대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사항이자, 반대로 경제개혁연구소나 한국거버넌스포럼에서는 현행 지배주주 중심의 이사회 운영에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의 하나로 평가돼 왔다. 

실제로 한국앤컴퍼니의 최대주주인 조현범 사장의 지분율은 40%를 넘지만 감사위원 선임 시에는 의결권이 3%로 제한됐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이자 국민연금 공식 자문사인 ISS가 지지를 표명한 이한상 교수는 조현식 부회장과 국민연금, 소수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감사위원(사외이사)으로 선임될 수 있었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조현식-조현범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이한상교수의 감사위원 선임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독립적인 감사활동과 지배구조 개선, ESG 강화 기대돼

페이스북 팔로워가 1만2000명이 넘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한 이한상 교수는 감사위원 선임 직후 페이스북에 “한국 기업 거버넌스 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에 작은 자국을 남기게 되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소감을 남겼다.

이한상 감사위원은 앞으로 한국앤컴퍼니의 지배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회계 투명성이나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한 이한상 교수의 기존 발언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한상 교수는 선임 직후 YTN과의 인터뷰에서 한편으론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지만 구체적인 발언을 삼가는 게 맞지 않나”라며 말을 아꼈고, 다른 한편으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고 감사위원은 법에 정해진 권한을 절차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라며 경제단체나 대기업들의 지나친 우려를 경계했다.

본인이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진 않았지만, 지난 1월 삼성준법감시위원회에서의 강연 내용을 근거로 몇 가지 추론해 볼 수는 있다. 

“(분리 선출된 감사위원은) 최대 주주 등의 입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있고, 감사위원회 내에서 나머지 감사위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 넣으면서 회사에 대한 감사위원회의 감사활동이 강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치 자신이 감사위원이 될 걸 예견이라도 한 듯한 발언이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긴장과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교통경찰이 서 있는 것만으로 운전자들이 교통법규를 더 잘 지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본인이 말을 아꼈던 ‘몇 가지 아이디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도 있다.

“현재는 활용되고 있지 않지만, 강화된 감사위원회는 상법상 회사의 비용으로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감사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발언이라든가, “준법지원인이 미전실(미래전략실), 사업지원 T/F가 회사가 만들어 놓은 규정에 적합하게 움직이는지 상시 감시하고, 그리고 혹 발생할 문제를 적시에 감지하고 포착하여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하며, 문제가 생긴 경우 담당 임원의 직무 배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과 같은 발언이다.

뭔가 기존의 이사회 산하 감사위원회에서는 한 적이 없는 실질적인 감사활동을 기대하게 하며, 아울러 많은 기업에서 형식적으로 두고 있는 ‘준법지원인’을 실제로 활용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담당 임원을 직무 배제한다니 감사위원회의 ‘준법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것 같은 느낌이다.  

강연에서 발언한 내용이어서 실제 한국앤컴퍼니에서 시도할 지는 알 수 없지만, 지배구조 측면에서 흥미로운 사항도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지배주주의 역할이다. 이한상 교수는 이재용 부회장을 겨냥해 직접 경영을 하지 않더라도 이사회 의장을 맡아 빌 게이츠나 발렌베리 가문처럼 지배주주로서 투자나 인수 같은 주요 의사결정을 하고 사업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거나 또는 워런 버핏이나 블랙록처럼 재무적 투자자로 남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쉽진 않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자신을 추천한 조현식 부회장에게는 그런 취지의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는 대기업이 선도적으로 ESG를 실천하고 협력업체에도 이를 확산하자는 주장이다. 삼성이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법의 하나로 언급하긴 했지만, BMW나 애플이 협력업체에 ‘RE100’ 도입을 강제하는 것이나 노동조건이 열악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폭스콘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을 예로 들며 ESG 경영을 강조했다. 한국앤컴퍼니에서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때마침, 주총이 끝난 다음날 한국앤컴퍼니는 4월1일부로 배터리 전문회사인 아트라스BX과의 흡수합병 절차를 마치고, 핵심사업 경쟁력 강화와 신규 사업 발굴을 목표로 하는 사업형 지주회사로 공식 출범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아트라스BX의 소수주주들이 이번 합병이 한국앤컴퍼니 대주주에게만 유리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합병에 반발하고 있다.

이사회 기록을 찾아보니 지난해 12월 합병을 의결하는 이사회에서 한국앤컴퍼니 사외이사 3인은 모두 찬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당시 이한상 교수가 있었다면 반대표를 던졌을까?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님의 캐리커처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하인사의 이슈리뷰】와 【나의 그린이야기】를 격주로 연재, ESG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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