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객관적 진실 혹은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격이다. 지난 4년 동안 봐 왔던 탈원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싸움이 늘 그랬다./픽사베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객관적 진실 혹은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격이다. 지난 4년 동안 봐 왔던 탈원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싸움이 늘 그랬다./픽사베이

 

난데없이 월성원전 삼중수소 논란이 이슈로 떠올랐다.

한쪽에서는 방사능 물질이 유출됐다며 국민들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고, 다른 쪽에선 ‘바나나’ ‘멸치’ 비유까지 동원하며 별일 아니라고 위험을 축소하고 있다. 보통은 야당이 공격하고 여당이 방어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공수 역할이 바뀌었다. 민주당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국민의 힘이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을 옹호한다.

이런 경우 전문가들이 개입하면 결론이 나야 한다. 하지만 원전 문제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워낙 강해 전문가의 주장도 소용없다. 무슨 얘기를 하든 원자력공학과 교수의 주장은 ‘원전’ 쪽, 환경단체나 환경공학과 교수는 ‘탈원전’ 쪽으로 간주된다. 원전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전문가들조차 자신들에게 ‘유리한’ 과학적 근거만 얘기한다는 걸 국민들도 알고 있다.

 

사실보다 이데올로기적 낙인 먼저 찍어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객관적 진실 혹은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격이다. 지난 4년 동안 봐 왔던 탈원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싸움이 늘 그랬다.

누군가 탈원전이나 신재생에너지 얘기를 하면 그 의견의 진위나 타당성을 따져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의 성향부터 확인하려 든다. 탈원전이면 환경단체, 혹은 문재인 지지로 연결되고 보나마나 왼쪽 성향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태양광의 무분별한 확대를 비판하면 원전 사업자나 그 주변, 문재인 반대, 오른쪽 성향으로 판별되기 쉽다. 즉, 사실보다는 일단 이데올로기적 낙인을 찍고 본다.

분단과 전쟁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했을 70~80대 연세의 어르신들조차 과거를 잊은 듯 이데올로기적 편가르기에 나서는가 하면, 지금은 586이 된 민주화 운동의 주역 386세대는 과거 운동권 내부에서 벌어졌던 NL대 PD 논쟁 못지 않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논쟁과는 무관할 것처럼 보이는 젊은 세대조차 주류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브에도 넘쳐나는 편가르기에 자신도 모르게 경도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겸양의 미덕이 사라진 지 오래고, 위선을 부끄러워할지언정 ‘위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한 집단을 사로잡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 편견과 선입견과 오류의 체계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서경채, 『인문학 개념정원』, 문학동네, 2018, 87쪽)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는 지금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데올로기 너머에 있는 진실과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1980년대 끄트머리에 대학을 다닌 탓에 모든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고, 기업에 오래 근무한 탓에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접점에 있는 에너지 정책에 대해 얘기하려다 보니 서두가 장황해 졌는데 곧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의 87% 가량은 에너지 부문에서 배출되고 있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를 아껴 쓰고, 플라스틱 사용은 줄이고, 재활용은 늘리고, 나무를 심고, 에코백이나 텀블러를 생활화하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이산화탄소 배출을 구조적으로! 효율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에너지 부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즉, 기존 화력연료에서 청정에너지로의 ‘에너지 전환’이 핵심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 이후 탈원전과 탈석탄,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근간으로 하는 에너지전환로드맵(2017년 12월),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2017년 12월)을 발표한 데 이어 제3차 에너지 기본계획(2019년 6월), 2050년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2020년 12월)에서도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탈원전과 탈석탄, 신재생에너지 확대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속도와 방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원전의 경우 향후 60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원전을 줄여나간다는 큰 방향에는 원전 업계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공약사항이라 할 지라도 이미 건설 중인 원전인 신고리 5,6호기와, 이전 정부에서 건설하기로 승인이 난 신한울 3,4호기까지 중단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이 컸다. 원전업계의 반발이 당연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고리 5,6호기는 ‘공론화위원회’를 거쳐 계속 건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신한울 3,4호기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남겨져 있다. 여권 일각에서조차 안전성이 크게 강화된 최신형 원전인 신한울 3,4호기는 계획대로 건설하고 대신 노후화된 원전을 조기 폐쇄하는 방안이 제기됐지만, 청와대의 완고한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원칙 지키면서 방법상 유연성 발휘하려면

나는 원칙과 유연성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칙은 지키면서도 방법 상의 유연성은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단과 방법은 유연해야 한다. 탈원전은 원칙에 해당하겠지만, 어떻게 줄여나갈지 구체적인 방법은 충분히 유연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2079년 원전 제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은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유독 원전 정책에선 항상 경직성을 보일 뿐이었다. 탈원전으로 가는 방법 상의 유연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우리 사회는 지난 4년 동안 양쪽으로 갈라져 소모적인 논쟁과 대립을 벌여야 했다. 급격한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원전을 건설하는 기업이나 협력업체, 원전업계 종사자, 대학의 원자력 학과에 이르기까지 탈 원전을 위한 출구전략을 모색할 기회조차 없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됐고, 해외 원전 사업조차 차질을 빚게 됐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그린뉴딜’과 ‘2050년 탄소 중립’ 선언을 보면서 정부도 소모적인 대립에서 탈피해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050년 탄소절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탈원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대립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는 ‘탈원전’에 연연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원자력 에너지를 향후 30년 동안 탄소 저감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옵션의 하나로 활용할 지 고민하면 된다. 원전은 위험한 에너지로 인식되고 있지만, 기저발전 가운데 유일하게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라 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원전 없이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은 어렵다. 탈원전을 하더라도 향후 60년은 원전을 사용해야 한다. 국민들이 우려하는 ‘위험’은 두렵다고 회피하기보단 적극 ‘관리’해야 할 문제이다. 

강력한 탈원전과 신재생 에너지 ‘모범생’인 독일은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이 화석연료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석탄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특히 석탄 중에서도 저품질의 갈탄 소비가 세계 1위이다. 아직까지 신재생에너지 기술이 화력연료를 완전히 대체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마다 에너지전환 정책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나라든 자신이 보유한 자원을 적절히 활용하여 탄소 제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탈원전을 반대하더라도 원전과 신재생 에너지를 대립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풍력, 태양광의 비효율,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어떻게 풍력과 태양광을 확대해야 할 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산림을 훼손하는 육상풍력이나 산지태양광보다는 부유식 해상풍력이나 건축물 일체형 태양광(BIPV, Building Integrated Photovoltaic System) 같은 기술의 발전과 확대, 대규모 공단이나 상업용 건물, 주차장, 창고 등 비주거용 건물의 태양광을 늘릴 방안을 함께 찾아야 한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같은 화석연료이지만 석탄보다 천연가스가 더 낫고, USC(Ultra Super Critical, 초초임계압) 화력발전이 기존 석탄화력보다 더 낫다. 탈석탄을 하더라도 석탄화력을 운영하는 동안에는 환경설비나 이산화탄소 포집설비를 통해 어떻게 탄소 배출을 줄일 지 고민해야 한다.

지난해 탄소 중립선언에 따라 우리나라는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설정한 기존의 온실가스 배출목표를 상향 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 위원회’에서 오는 6월까지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전적인 목표 설정과 달성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탈원전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질곡에서 빠져 나와 원전의 적극적인 활용과 신재생 에너지 확대를 위한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님의 캐리커처
하인사님의 캐리커처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   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   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   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   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   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하인사의 이슈리뷰】코너   를 통해, ESG와 관련한 다양한 기업 이슈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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