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 쌓여있는 종이신문들./픽사베이
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 쌓여있는 종이신문들./픽사베이

 

홍보팀 업무의 절반은 언론 모니터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회사나 업종, 경영, 경제 분야 주요 뉴스들을 모니터링하고, 필요하면 스크랩해 임직원들에게도 공유한다. 가판이 나올 시간이면 혹시나 이슈가 될만한 기사는 없는 지 꼼꼼히 체크하고 별일 없어야 맘편히 퇴근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 종이신문을 잘라 스크랩했다. 회사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당번을 맡은 날은 새벽같이 출근해야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 매체가 급격히 늘어나고 ‘스크랩마스터’나 ‘아이서퍼’ 같은 프로그램까지 보급되며 모니터링 범위가 넓어졌지만, 그래도 핵심은 종이신문이었다.

회사 경영진들도 종이신문을 선호한다.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매체에 기사가 나도 다음 날 아침 조간(종이) 신문에 실리지 않으면 “왜 기사가 안 났냐”고 채근한다. 종이신문에 실려야 기사의 밸류(Value)도 높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온라인 위주로 모니터링 시스템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많은 홍보팀 직원들은 아침에 종이신문을 본다. 종이신문을 보지 않으면 신문을 본 것 같지가 않다. 갓 배달된 신문에서 나는 잉크 냄새를 맡으며 손에 침을 묻혀 넘기면서 봐야 제 맛이다. 1면 헤드라인이 무엇인지 정치, 경제, 사회면의 주요 이슈가 무엇인지 지면을 넘기며 봐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신경을 쓰는 산업면도 지면을 한 눈에 봐야 어떤 기사들이 어떤 비중으로 다뤄지는 지 가늠할 수 있다. 종이신문을 보면서 시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기사를 보는 안목을 갖출 수 있다.

기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기사 밸류(Value)를 판단하는 능력이라면, 그들에게 기삿거리가 될만한 아이템을 제공해야 하는 홍보 담당자에겐 신문사별 지면 분석이 기본이다. 홍보팀에 신입사원이 오면 일부러 종이신문 보는 버릇을 들이게 하는 이유다.

신문사들이 발행하는 종이신문의 유료부수는 신문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척도이자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미디어 오늘>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실사 결과를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그 동안 ABC협회가 공사(公査), 인증(認證)한 유료부수가 실제보다 2배 정도 부풀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16만부라고 발표했던 조선일보의 실제 유료부수는 58만부 수준으로 추정된다. 함께 조사한 동아일보, 한겨레신문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크게 놀랍지는 않다. ABC협회의 공사 부수가 최근 종이신문의 급격한 감소추세를 반영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있었다. <미디어 오늘>이나 KBS에서는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상당량의 종이신문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신문사 지국에서 곧바로 ‘계란판’ 제조공장으로 넘어가는 실태를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로 ABC협회와 신문사들의 유료부수 부풀리기 의혹이 마침내 사실로 확인됐다. 오랫동안 홍보 업무를 한 사람으로서 애정하던 종이신문의 몰락이 안타깝다. 한 때 신문의 부흥을 이끌었던 종이신문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때마침 정치권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비롯한 언론개혁 입법이 논란을 빚고 있어 종이신문 시대의 몰락과 언론의 위기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현재 우리나라 언론의 위기는 신문사만의 위기는 아니다. 언론 생태계 전반의 위기다.

우리나라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 비교하면 언론의 자유는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고 있지만, 언론의 신뢰도는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이다. 메이저 언론사인 조중동에 대한 불신이 가장 높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세월호 보도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며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가운데, 최근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정파적 성격이 강한 언론에 대한 불신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조국 법무부장관에 대한 보도를 계기로 전통적인 언론사의 신뢰도와 일개 개인 유튜브 방송의 간극마저 사라졌다. 공중파나 메이저 언론사들마저 특종경쟁에 휘말려 대형 오보를 남발하기도 했다. ‘단독’이 남발되어 이제는 ‘단독’이 붙지 않은 기사를 골라 읽어야 할 판이다.

언론에 대한 불신의 책임은 1차적으로 언론사에 있겠지만, 독자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사 내용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지 않으면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기레기’로 몰아붙인다. 댓글을 통해 기자 개인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진영에 불리한 사실에 대해선 애써 눈을 돌리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에는 아예 귀를 닫는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필터버블 기능으로 인해 SNS에선 나의 관심과 성향에 맞는 뉴스만 보게 되니 자신이 믿고 싶은 사실만 믿는 ‘확증편향’은 날로 심화된다.

포털에 의존하는 언론사는 조회수를 고려해야 하니 이런 독자들을 겨냥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자신의 성향에 맞는 기사만 골라 소비하게 되고, 관심이 없는 독자는 정치 기사는 아예 보지 않게 된다. 언론을 통해 다양한 뉴스와 의견을 접하는 순기능은 사라지고 개인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고착화되는 악순환만 되풀이되고 있다. 한마디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양상이다.

언론의 자정 기능을 기대하기엔 이미 늦은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잘못된 언론보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한다고 해서 현재의 언론 생태계가 개선될 지도 모르겠다. 언론은 그렇다 치고 현재 언론환경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이 최근 언론계 전문가 5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 언론이 버려야 할 3가지는 “정파성, 포털 의존, 특권의식”, 취해야 할 3가지는 “독자, 팩트, 수익모델”로 꼽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는 건 ‘팩트’다. 요즘 언론에서 구사하는 말과 글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합리적 근거와 논증이 부실한 보도가 넘쳐난다. 저널리즘의 품격은 팩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독자들도 매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키워야 한다. ‘신문 기사는 공짜’라는 인식도 재고해야 한다. 정파적 입장을 떠나 오보를 내고도 정정하지 않거나 반성하지 않는 매체를 멀리 하고 자신에게 유용한 컨텐츠를 제공하는 매체를 구독하거나 후원해야 한다.

만약 언론에 대해서도 ESG 평가를 할 수 있다면 독자들의 판단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종이신문의 몰락이 언론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님의 캐리커처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하인사의 이슈리뷰】와 【나의 그린이야기】를 격주로 연재, ESG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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