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대표의 성희롱 사건은 박원순 서울시장과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진보적 가치’인 ‘양성 평등’을 전면에 내세웠던 진보정당의 대표가 바로 그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했기 때문이다. 2~3년 전 몰아쳤던 미투(Me Too) 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도 크게 개선됐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앞서서 이 운동을 지지하고 이끌었던 정당의 대표가 하루아침에 가해자로 둔갑했다. 평생을 인권 옹호와 시민운동에 헌신한 박원순의 비극이, 그 개인의 삶의 맥락에서 안타까움을 남겼다면, 김종철 대표의 일탈은 성희롱 문제에 관한 한 진보정당도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 같은 기성 정당과 다를 바 없다는 자조적인 허무를 안겨줬다.
가장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조직도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현실 앞에서 나도 단지 ‘50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자기 성찰을 하게 된다. 우리 세대는 한 때 ‘88꿈나무’로 불린 적도 있기 때문에 덮어놓고 ‘꼰대’로 불리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미투 운동으로 이 단어가 유행처럼 떠올라 어느 사이트에 가서 나의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 수준인지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점수가 나쁘진 않았지만, ‘나는 평소 여성 직원에게 결혼계획에 대해 가끔 물어보는 편이다’라든지 ‘나는 사무실에 손님이 오면 여성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편이다’ 같은 질문에 솔직하게 ‘그렇다’라고 답을 하면서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미혼 직원들에게 결혼계획을 물어보는 걸 선배의 ‘관심’으로 생각해 왔고, 내 커피는 내가 탈지언정 손님 커피는 은연 중에 여직원에게 시켜왔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변화로 인해 대기업에서는 전형적인 꼰대들마저도 환골탈태했다. 요즘은 여직원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 대한 그 어떠한 칭찬이나 언급도 ‘의식적으로’ 삼간다. 선의의 관심이나 칭찬이라 할 지라도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몇 해 전만해도 여직원들에게 ‘이쁘다’ 혹은 ‘이뻐졌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요즘은 사무실에 손님이 와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면 임원들도 직접 커피를 타서 대접한다. 회식도 급격히 줄어든데다 2차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1차에서도 임원 앞이나 옆자리에 여직원을 앉히는 관행도 없어졌다. 인사팀에선 팀장급 이상 관리자에 어떻게 여성인력의 비중을 늘려갈 지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어떤 경영자의 머리 속엔 여성의 역량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을 지 몰라도 여성 관리자를 늘려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식하고 있다.
방송사의 뉴스앵커를 보면 우리 사회 전반적인 성인지 감수성도 높아졌다는 걸 느낀다. 과거에는 40~50대 중년 남성과 20~30대 젊은 여성 앵커 조합이 당연하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중년 여성 앵커 단독 진행이나, 중년여성과 젊은 남성의 조합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젊은 여성 앵커는 아나운서 세계의 금기를 깨고 뉴스 진행 시 안경을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분명 최근 2~3년 사이 성인지 감수성이 크게 높아진 것은 맞지만, 직장갑질119라는 단체가 31일 발표한 ‘직장인 성희롱, 괴롭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여전히 위계에 의한 직장 내 성희롱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신고 후에 불이익을 겪었다는 사례가 90%를 넘을 정도로 성희롱 사건에 대한 사용자들의 엄정한 처리와 재발방지 대책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직장 내 성희롱은 거시적으로 보면 피해자뿐만 아니라 기업과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기업은 성희롱으로 인한 고소와 보상처럼 직접적인 피해비용은 물론이고 부정적 이미지 양산, 우수한 인재의 유출과 낮은 동기부여, 생산성 저하와 같은 추가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어느 연구팀이 성희롱 사건의 발생빈도가 높은 기업들의 실적을 추적한 결과, 성희롱 사건이 많이 발생한 기업일수록 미국 주식시장에서 19.9% 가량 실적이 저조했다는 조사도 있었다.
정의당이 당대표의 성희롱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나는 정치적 공격과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역대급 성희롱 스캔들을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성 정당이라면 ‘당의 존립과 관계된 일’이니 당대표가 책임지고 물러나되 성희롱 사건은 조용히 덮고 넘어가자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을까? 우리 사회의 얼마나 많은 조직들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불관용(No Excuse) 원칙이다. 이런 언급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김종철 대표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성희롱 사건은 뼈아픈 실수였을 수도 있다. 그의 평소 언행이나 가치관, 성인지 감수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성희롱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잘못을 저지른 순간 모든 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그의 성인지 감수성이 아무리 높았더라도, 현재 아무리 대단한 위치에 있더라도 이제 관용은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정의당은 사건 발표 직후 ‘2차 가해’ 제보를 받는다며 그 범위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사건과 관련한 어떠한 이의제기나 논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일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투명하고 공개적인 사건 처리와 당의 최고 권력자에게도 불관용 원칙을 관철함으로써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고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스스로 성인지 감수성이 높다고 자신하는 세상의 50대들이여 이제 명심하자. 성희롱은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No Excuse!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하인사의 이슈리뷰】와 【나의 그린이야기】를 격주로 연재, ESG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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