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유럽연합(EU) 간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여부를 조사해온 전문가 패널이 한국 정부의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인정해 '관련 협정을 위반한 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는 “우리 손을 들어줬다”며 “EU의 비준 요구 자체가 무리했다”고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EU는 정반대 분위기다. 이번 전문가 패널 조사 결과로 결정이 뒤집어지기까지는 적잖이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노동부는 한-유럽연합 FTA 전문가 패널 보고서 내용을 공개하며 “(전문가 패널이) 유럽연합이 제기한 쟁점에 대해 개정 전 노동조합법의 일부 개선을 권고하면서도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유럽연합은 두 가지 쟁점사항에 대해 문제를 제시했다. 한국이 ILO 핵심협약 중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아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는 FTA 조항을 어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ILO 기본권 선언에 있는 노동기본권 원칙을 자국의 노동법·관행을 통해 존중·증진·실현하기로 약속한 조항도 어겼다고 지적했다.
이에 2018년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조항에 따라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 작년 7월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에 들어갔다. 전문가 패널은 지난 20일 양국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문가 패널은 양국을 대표하는 패널 각 1명과 양국이 협의한 제3국 의장 등 총 3명으로 구성된다.
패널은 유럽연합이 제기한 쟁점 가운데 ILO 협약 비준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노력이 인정된다”며 협정을 위반한 바 없다고 결론지었다. 한국의 노력 자체는 한-EU FTA 규정에 정한 법적 기준에 미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노동기본권 원칙을 국내법과 관행에서 존중, 증진, 실현하기로 약속한다’는 조항과 관련해선 ▲개정 전 노조법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의 노조 가입을 제한(노동조합법 2조)한 점 ▲조합원만 노조 임원으로 선출(노동조합법 23조)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 등 두 가지가 국제노동기구의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개선을 권고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에 관한 FTA 규정은 반드시 협약 비준 등 성과를 내야 하는 '결과의 의무'(an obligation of result)가 아니라 '최선의 노력 의무'(an obligation of best endeavours)이고, 구체적인 목표나 일정 없이 진행하는 성격을 갖는다고 해석했다.
다만 정부는 이 보고서가 작년 11월 25일까지 상황을 기준으로 작성돼 개정 노조법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EU가 그동안에 문제 제기했던 부분은 대부분 해소됐다고 판단한다"며 "2월 국회에서 비준안까지 통과돼 ILO의 비준서를 통과시키면 경제적 ·정치적인 압력에 대한 우려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발표 직후 정부는 ”전문가 패널이 우리 정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FTA 13장(무역과 지속가능발전)을 구속력 있는 의무로 판단하고 권고한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노조설립 신고제도와 관련해 추가 논의를 하라는 패널 권고에 따라 곧 국장급 위원회인 무역과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구성해 관련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한국은 ‘우리 손’ 들어줬다고 발표했지만
EU는 정반대 분위기
정부는 이번 전문가 패널 조사 발표로 “우리의 노력을 인정해 준 것”이라며 보고서를 근거로 EU에 대응해나가겠다는 입장이지만, EU의 상황은 정반대로 보인다. 정부는 ‘마무리 절차’로 보고 있지만 EU는 ‘이제 시작’이라는 입장이다.
EU는 공식 홈페이지에 “전문가 패널의 결과는 한국이 우리의 무역 협정에 따른 노동 약속을 위반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다”는 성명을 냈다. 패널 보고서를 한국의 승리로 보는 정부의 시각과는 판이하다. EU는 또 “패널 보고서는 한국이 EU-대한민국 무역 협정에 따른 무역과 지속가능한 개발의무에 일관성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EU의 우려를 확인시켜줬다”고 해석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무역담당관은 “이번 패널 판결은 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협력 기반 접근법의 효과를 보여준다”며 “전문가 패널 소집 과정에 들어가자 한국은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앞으로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약속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를 근거 삼아 꾸준히 한국에게 ILO 비준에 압박을 가할 것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읽을 수 있다.
더불어 패널 소견을 소개하면서 정부가 강조한 “한국 정부는 협약 비준에 대해 노력을 해왔다”는 문구는 소개하지 않았다. 대신 “ILO 비준에 관한 FTA 규정은 결과의 의무가 아닌 최선의 노력 의무”라고 판단한 점을 내세워 “EU의 주장을 재확인 시켜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분쟁 과정에서 우위를 점했다며 분쟁이 무난하게 끝날 것으로 보고 있지만, EU의 분위기를 봐서는 그리 녹록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과 EU가 맺은 FTA는 E·S·G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포함된 첫 신세대 무역협정인 만큼, EU는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총력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첫 선례에서 기선제압을 해야, 앞으로의 무역 협정에서 유리한 입장을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EU는 ESG를 지키지 않는 나라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선 인권과 노동권이 존중되지 않는다고 특혜를 중단했고, 말레이시아에선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며 팜오일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베트남 무역협정과도 관련, EU는 베트남 노동권 문제를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으나 베트남 정부가 ILO 기본노동규약을 비준하고 자국 노동법 개정을 약속해 협정을 비준한 바 있다. 다만, 협정 발효 후 베트남이 노동규약 비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지난 주 유럽의회는 베트남의 노동규약 비준 및 구체적 이행에 관한 로드맵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국과 맺은 포괄적 투자보호협정에서도 중국이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ILO 기본 노동권 협약 비준을 강제할 구속력이 없다는 문제도 제기되는 만큼, 한국을 첫 선례 삼아 중국을 압박할 카드로 쓸 수도 있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