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에비앙’으로 친숙한 프랑스 식품기업 다농의 CEO 에마뉘엘 파베르가 물러났다. 2014년부터 7년간 다농을 이끌었던 파베르는 대표적인 ESG 전도사였다. 그는 2019년 UN 기후변화 서밋에서 삼림 벌채와 과도한 농지 개발을 비판하며 생물다양성과 지속가능한 식품시스템 구축을 주장한 바 있으며, ‘RE100’에도 선도적으로 가입했다. 특히 지난해 초에는 이익 가운데 탄소배출로 인한 원가를 제외하고 수익을 산출하는 ‘탄소 조정 주당순이익’(Carbon-adjusted EPS)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SG에 기울인 노력에 비해 실적은 좋지 않았다. 재임 기간 동안 주력제품의 판매부진이 거듭되고 경쟁사인 네슬레나 유니레버에 비해 주가상승률이 저조한 흐름을 보이자 다농의 주요 투자기관들은 몇 개월 전부터 이사회에 퇴진을 요구해 왔다. 파베르가 스스로 사임했지만 주주이익 극대화를 내세운 행동주의 펀드가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ESG경영자를 쫓아낸 셈이다.
다농의 사례를 두고 환경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ESG가 경영실적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즉, 사회적 책임에 집착하다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는 식으로 폄하하는가 하면, ESG가 가야 할 길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실적 악화를 초래할 수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ESG 경영의 딜레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ESG가 기업경영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까? ESG와 경영실적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은 쉽지 않다. 섣부른 판단은 결과론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의 'ESG 성과별 영업실적 및 주가 하락 위험' 보고서에 따르면, ESG를 잘하는 기업은 실적이나 주가가 급락할 개연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즉, ESG경영이 리스크를 예방하거나 이슈발생시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ESG 경영이 장기적으로 기업가치 제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가설은 가능하다.
다농의 경쟁사인 유니레버나 네슬레도 ESG경영의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다농의 실적부진 원인을 ESG경영의 실패에서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파베르의 ESG경영이 밑거름이 되어 장차 다농이 재도약할 수도 있으므로 섣불리 실패했다고 단정짓기보단 좀 더 지켜봐야 한다.
ESG 경영의 딜레마(?)
만약 다농을 일시적인 실패로 본다면 ESG경영에 성공한 기업들의 모습은 어떨까? 서진석 행복나눔재단 그룹장이 얼마 전 펴낸 『행동주의 기업』에는 비즈니스를 통해 환경이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의 얘기가 나온다.
이들은 다농의 CEO 못지 않게 환경, 사회적 가치 추구에 선구적이다. 러쉬는 화장품이나 비누에 들어가는 팜오일 재배가 열대우림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팜오일이 들어가지 않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훼손된 열대우림 지역에 직접 땅을 사서 숲을 복원하기도 했다. 닥터브로노스의 CEO는 국립공원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과 맞장을 뜨는가 하면, 화장품 만드는 식물성 천연 재료의 허용을 주장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비즈니스 영역을 넘어 트랜스젠더 지지, 난민 인권 옹호처럼 민감한 사회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임직원들에게 회사 매장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캠페인을 권장하고, 전 세계 매장에서 일제히 글로벌 기후파업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사업을 위해 사회적 이슈 해결에 앞장서는 것인지, 사회적 이슈 해결을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이다.
그럼, 이들 기업의 실적은 어땠을까? 일견 비즈니스보다 환경과 사회문제 해결에 더 치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놀랍게도 경영실적은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기농 제품, 천연 소재 사용, 그리고 공급망 최종 단계의 생산자까지 지원하느라 제품의 가격이 경쟁사보다 턱없이 높지만–물론 품질도 월등하다- 이들 기업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충성도 높은 고객들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비즈니스 혁신과 결합된 성공사례 나와야
환경이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사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면 너무나 이상적인 얘기이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행동주의 기업들도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나 제품 라인업의 축소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창업자나 CEO가 자신들의 경영철학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여 끝내 성공을 거두었다.
행동주의 기업들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자신들이 영위하는 사업의 본질 혹은 기업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환경이나 사회적 가치를 마주했다. 진지한 고민 끝에 환경과 사회적 가치를 제품이나 비즈니스 혁신으로 통합하고 전 임직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고객과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고객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ESG 열풍이 불고 있지만, ESG가 곧 성과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듯 실적부진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다농의 실적부진과 파베르의 사퇴는, 사업의 핵심 가치 속에 환경, 사회적 가치를 통합하고 임직원의 참여, 고객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진지한 고민을 던져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어디선가 어떤 벤처기업가가 행동주의 기업들처럼 ESG경영을 위한 새로운 실험과 모색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한때 친환경 제품으로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기업들도 없지 않다. 어떤 기업이든 비즈니스 혁신과 환경,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ESG경영에 성공함으로써 막 움트기 시작한 우리나라 ESG 생태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길 희망한다.
※하인사(hindsight)님은...

'하인사(hindsight, 필명)'는 뒤늦은 깨달음, 뒤늦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 지속가능성 모두 인류의 뒤늦은 깨달음이라는 의미이지요. 하인사님은 대기업 홍보팀에서 20년 가량 일했습니다. 회사의 지역사회 공헌활동을 기획하면서 CSR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으며, 회사 CSR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ESG 이슈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고민했습니다. 2021년부터 <임팩트온>에서 【하인사의 이슈리뷰】와 【나의 그린이야기】를 격주로 연재, ESG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